"뿌연 최루탄 가스가 자욱한 거리에서 시민을 질질 끌고 가는 경찰, 쇠 파이프를 휘두르고 화염병을 던지는 학생…."
1990년대 초반 미국에서 공부한 한 교수는 "당시 미국 신문에 한국 기사는 가뭄에 콩 나듯 적게 보도됐지만, 가끔 나올 때면 학생'노동자들의 데모 장면을 찍은 사진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언젠가 옷이 발가벗긴 채 경찰에 끌려가는 학생 사진과 함께 짤막한 기사가 게재됐는데, 왜곡되고 편향된 내용이어서 유학생들의 분노를 자아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예전에 미국이나 유럽에서 바라본 한국은 폭력 시위의 '천국'이었다. 경찰과 시위대가 도심에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공방을 벌이니 제대로 된 나라라고 생각할 서양인이 있겠는가. 19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과격한 시위 방법을 익힌 시위대가 폭력적이고 전투적인 방식으로 의사를 표현했고, 외국에서는 이를 한국의 시위 문화로 알고 있었다.
영국 좀비 영화 '28일 후'(2002년)에는 초반부에 상반신을 벗은 시위대가 누워 있고, 진압 경찰이 폭력을 행사하는 참혹한 장면이 나온다.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짓밟는 경찰의 등에는 한글로 '경찰'이라고 크게 적혀 있었다. 원숭이들에게 분노 바이러스를 생성하기 위한 학습용 영상에 한국 경찰이 등장하니 한국인으로선 낯 뜨거울 수밖에 없다. 호주 영화 '그날이 오면'(2000년)에는 중국 소식을 전하면서 한국 시위 장면을 사용하고 있다. 감독의 오류임에 분명하지만, 한국 시위대의 과격성은 그만큼 유명하다는 얘기다.
12일 100만 명이 모인 촛불집회가 서울 중심가에서 열렸는데, 이를 본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엄청난 군중이 모였음에도, 그렇게 평화롭고 흥겹게 진행된 것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장면이다. 한 외신은 '분노는 컸고 평화는 강했다'고 표현했다.
19일에도 서울 60만 명, 지방 32만 명이 모였지만, 자잘한 사고 하나 없었다. 한국인은 평화적인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체득했다. 과거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길 바라는 것과 같다' '한국인은 들쥐와 같은 민족이다' 같은 비아냥을 받았지만, 이제 한국인의 시민 의식과 시위 문화는 전 세계 '명품'의 반열에 올려도 될 정도다. 26일 촛불집회에는 전국에서 200만 명이 집결하기로 했다니 다시 한 번 한국인의 위대함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박병선 논설위원 l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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