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달해의 엔터 인사이트] 완성도에 따라 달라진 불륜 드라마

불륜=막장? 선입견 깼다

◆'공항 가는 길', 섬세한 감성 눈길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로 쓰였다면 '과한 설정'이란 말이 나올 정도의 리얼 막장극이 현실에서 펼쳐지고 있는 요즘이다. 뉴스가 대중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며 주목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있으니, 어지간한 드라마로는 시청자의 시선을 끌어 모은다는 게 쉽지가 않다. 현직 대통령이 피의자가 되고, 그럼에도 제 잘못을 모른 채 뻔뻔한 짓을 이어가고 있는 기가 막힌 상황이라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화제성도 예전 같지가 않다. 벌써 4주째, 아무렇지 않은 듯 대중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게 맞는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단, 지난 10일 마지막 방송을 마친 '공항 가는 길'을 살펴보자. 내용을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유부남과 유부녀의 만남을 다룬 드라마가 맞다. 베테랑 승무원으로 일하며 가정까지 돌보는 워킹맘 김하늘(최수아 역)이 우연한 기회를 통해 유부남 이상윤(서도우 역)을 만나 흔들리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가정이 있는 남녀의 만남으로 소재 자체가 가진 자극성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대놓고 막장극을 표방하는 다수 일일극을 제외하고 프라임 타임대에 편성된 지상파 미니시리즈가 불륜을 소재로 택하는 예가 흔치 않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모험에 가까운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방송 직전까지도 '센 소재를 가져와 시청률을 끌어올리겠다는 얄팍한 수가 아니냐'는 선입견에서 벗어나느라 애를 먹었다.

하지만 뚜껑이 열린 뒤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적어도 최근 수년에 걸쳐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여백미와 감성적인 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각 캐릭터의 감정선을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살려내 인물들이 만나고 갈등하는 과정에 시청자들이 공감하도록 만들었다. 가정이 있는 남녀 주인공의 만남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들의 배우자 캐릭터가 가진 심각한 결함을 부각시키는 등 작위적인 설정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각 캐릭터들의 행동 패턴이나 그들의 입 밖으로 나오는 대사에서는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결말에 이르러 남녀 주인공이 각자의 가정을 뒤로하고 결국은 함께하게 되는 과정이 그려졌지만 이 또한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불륜을 지켜보고 있다'는 부담감을 덜어줬다.

◆불륜 소재 요리도 고급화 전략이 관건

'공항 가는 길'이 유부남과 유부녀의 만남 그 자체에 좀 더 집중했다면 전형적인 불륜 드라마가 됐을 것이고, 오히려 그 안에서 몰입도를 높일 만한 이야기를 끌어내 시청률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공항 가는 길'은 고급화 전략을 택해 불륜 드라마를 세련된 멜로드라마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공항을 배경으로 삼은 것도 꽤나 영리한 선택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그리고 이별이 교차하는 장소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불륜 자체가 아닌 '극 중 인물들의 감정'을 보여주는 드라마란 사실을 알릴 수 있었다. '공항 가는 길'이란 추상적인 느낌의 타이틀이 드라마 홍보 차원에선 방해가 될 수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전체적인 톤을 유지하고 완성도를 높이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남녀 주인공은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대화하고 그 메시지 안에 일상적인 내용뿐 아니라 그 시간 자신이 느낀 감정을 담아 공유한다. 이때 감독은 피사체를 화면에 꽉 차게 담아내지 않고 공간을 함께 보여주며 여유로운 구도로 장면을 완성한다. 흘러나오는 음악 역시 가을 느낌 물씬 나는 잔잔한 톤이다. 영화 '접속' 등 1990년대 멜로영화의 감성이 느껴지는데, 덕분에 이에 익숙한 40대 이상 중년들에게는 반가움을 주고 그보다 젊은 시청자들에게는 새롭다는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이 고급화 전략은 또 다른 불륜 소재 드라마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에 적용해도 말이 된다. 이 드라마는 가정과 일에 충실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하는 프로덕션 PD 이선균(도현우 역)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아내 송지효(정수연 역)의 외도를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극 중 송지효는 '천사표'가 따로 없을 정도로 남편과 아들을 잘 챙기고 집안일에 흐트러짐이 없는 아내, 그러면서 자신의 일까지 열심히 해내는 '슈퍼 워킹맘'이다. 하지만 아내의 속내는 그렇지 않다. 일과 가정을 두루 챙기며 몸과 마음이 지쳐 썩어 문드러질 지경이다. 단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감정이 외도로 이어지고 그러다 이를 알게 된 남편과 갈등을 겪게 된다.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는 '공항 가는 길'과 달리 코믹 소동극의 느낌을 준다. 대놓고 웃음을 유발하는 상황 설정과 과장된 톤의 연기, 그리고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인물들의 대사 등 코믹극의 요소를 두루 갖춘 드라마다. 이럴 경우 자칫 진지함을 잃어버리고 흥미성 위주의 에피소드를 통해 시청률을 끌어올리는 길로 들어설 가능성이 커지는데, 다행히도 이 드라마는 진지함과 가벼움의 강도 조절을 능수능란하게 해내며 호평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불특정 다수 네티즌들의 의견을 경청하며 바람난 아내와의 관계를 정리해 나가는 과정 등 '요즘 세대'들의 이해와 관심을 끌어낼 수 있는 설정을 더해 또 다른 재미 요소로 활용했다. 이 과정에서 불륜을 대하는 여러 사람들의 생각 차이를 알려주며 가치관의 차이가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도록 유도한다.

최대 강점은 집중력을 잃지 않는 연출이다.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는 캐릭터 설정이 명확하고 각 인물들의 개성이 강한 만큼 인물의 성격이나 감정선을 놓치게 되면 드라마 전체의 몰입도가 심각하게 흐트러질 수 있다. 실제로 코미디를 부각시키는 드라마는 웃음을 위한 과장된 설정을 추가하다 인물의 성격을 바꿔 몰입도를 떨어트리는 일이 잦다. 이 드라마의 연출을 맡고 있는 김석윤 PD는 과거 '송곳'이나 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 등을 만들면서 보여 줬던 대로 뒷심을 잃지 않고 등장인물들의 위치와 내러티브의 전개에 집중한다. 불륜을 저지르게 된 아내의 입장이나 이 때문에 힘들어하는 남편이 나오지만, 그 안에는 그들의 입장이 섬세하게 묘사돼 보는 이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상식선에서 필수요소 하나하나에 신경을 기울이고 완성도를 높이면 불륜 소재 드라마도 이처럼 탄탄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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