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편애도 범죄라니까

굳이 진화론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생물은 늘 환경에 맞도록 변화하고 달라져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무는 나무대로, 곤충은 곤충대로, 물고기는 물고기대로, 새는 새대로 좀 더 안전해지기 위하여, 그 나름 편안해지기 위하여, 나아가 험난한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서서히 또 조금씩 몸을 바꾸어온 것이다. 보다 나은 유전자를 얻기 위하여 움직인다는 점은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종자 개량'을 해보겠다면서 큰 키나 마른 체형 혹은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이성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숱하다는 것을 보면 말이다. 혈통의 개량 또한 엄연히 진화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태어남과 죽음이 반복되는 동안 취향과 기호라는 유전자가 대물림되었다. 사람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든 기울어지도록 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언제나 더 좋거나 더 싫은 것이 있어왔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한 바람직한 일이다. 더 좋은 것은 발전 혹은 확장시키고, 더 싫은 것은 극복 혹은 인내하면서,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해 나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감정이 사람에 대한 차별이라는 직접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면 상황은 비극으로 길을 튼다. 특히 여러 명의 자녀를 대상으로 벌어지는 부모의 차별은 그럴듯하게 포장된 갖은 명분을 뒤집어쓰고 자행된다는 점에서 아주 그악한 범죄라 하겠다. 게다가 당하는 입장에서는 항거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고통도 밑천이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것은 진실이어서, 얼마간의 고통은 독감 백신처럼 사람의 면역력을 키운다. 그래서 차별 속에서도 꽤 건강한 아이가 나오기도 한다. 문제는 적정량을 초과했을 때 나타난다. 과한 백신은 사람을 실제로 환자로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양이 과한지 아닌지는 각자의 신체가 증명한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같은 양의 비를 맞아도 유난히 녹이 잘 스는 물질이 존재하듯이, 감정에도 개별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니 편애에 대한 핑계로 드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겠느냐'는 식의 말은 명백한 위선이다. 모든 손가락을 동일하다고 간주하는 것부터가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 똑같은 압력을 가해 손가락을 입으로 물어뜯으면 어떤 손가락은 말짱하지만, 어떤 손가락은 멍이 들고, 어떤 손가락에서는 피가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한쪽으로 쏠리는 마음을 멈추지 못하겠거든 가식이라도 부려야 할 것이다. 명배우도 울고 갈 만큼의 연기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쩌겠는가, 그렇게라도 해야지. 손가락 하나를 잘라 내버릴 작정이 아니라면 말이다. 아,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제발 편애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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