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황유선이 만난 사람] 정창호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

"공정한 경쟁 이뤄지는 사회제도 만드는 게 정의"

사진=이무성 객원기자
사진=이무성 객원기자

"국격 하락" "나라 망신"이라는 자조로 점철되었던 연말을 헤쳐 나와 대한민국은 국정 농단 사건을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의 궤도에 겨우 올려놓았다. 그러나 새해 벽두부터 위안부 합의 논쟁을 둘러싼 일본의 주한 대사 소환, 사드 배치 결정을 겨냥한 중국의 유무형 경제 제재, 미국 트럼프 정권의 예측 불가 대외 정책 등 국제적 격랑이 다시 몰아치고 있다. 대한민국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과연 국민이 행복한 삶은 실현 가능한 것인가 타진해 볼 시점이다.

이를 위해, 해외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국제법 전문가이자 현직 판사를 만나 고국의 상황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국제적 관점에서 더 객관적인 진단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다.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ICC) 정창호 재판관은 주오스트리아 대사관 사법협력관, 캄보디아 특별재판소(ECCC) 유엔재판관 등 주로 국제적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온 법조계의 대표적인 젊은 리더이다. 연말연시 휴정기간을 맞아 한국을 방문한 정 재판관을 헤이그 현지 ICC 판사실과 한국의 대법원에서 두 차례 만났다.

국제형사재판소가 소재한 네덜란드 헤이그는 국제형사재판소 이외에도 국제사법재판소, 상설중재재판소, 유고전범재판소 등 여러 국제사법기구가 위치해 있는 '국제법률수도'이다. 우리에게는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다 좌절한 이준 열사로 낯익은 곳이다. 대한제국의 법률가였던 이준의 회한이 서린 헤이그에서는 이미 우리나라의 1세대 국제재판관인 송상현 전 ICC 소장과 권오곤 전 유고전범재판소 재판관이 명성을 떨친 바 있고, 이제 그 뒤를 이어 정창호 재판관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는 2014년 12월 ICC 회원국 총회 신임 재판관 선거 당시 유일하게 1차 투표에서 당선됐고 47세 나이로 ICC 역사상 최연소 재판관으로 임명됐다. 2015년 ICC 부임 직후 한국 법원의 실무제요에 착안한 ICC 재판절차 실무 매뉴얼을 만들어 재판절차 효율화에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한민국은 이렇듯 국제사회에서 계속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정 재판관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나라는 자랑스러운 나라, 그리고 국민이 행복해질 수 있는 나라라는 믿음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이 결코 한가하지 않다. 전 세계 쟁쟁한 법조인들과 함께 일하는 입장인데 망신스럽진 않은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정치 지도자들 관련 문제는 전 세계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발생한다. 오히려 국제사회의 현실은 이에 대해 문제제기조차 못 하거나 상황이 극도의 혼란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같은 저개발국은 물론이고, 선진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번에 우리나라는 달랐다. 관련 문제가 현안이 되고, 검찰이 수사에 나서고, 국회 논의를 거쳐 탄핵 절차가 시작될 때까지 일련의 과정이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절차에 따라 다루어지고 있다. 시스템이 작동하는 우리의 상황을 국제사회가 부러워한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다.

-우리의 상황을 부러워한다니 상당히 놀랍다. 함께 일하는 다른 나라 출신 재판관들 혹은 ICC 직원들이 우리나라 상황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인가.

▶물론이다. 특히,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때에는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나라의 촛불집회에 대해 얘기할 정도였다. 그들은 우리 국민의 성숙한 시위 문화에 대해서 높이 평가했다. 또, 탄핵심판은 국제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헌법재판소가 국제적 수준의 공정한 재판 원칙에 따라 투명하고 효율적인 재판을 진행할 것으로 확신한다. 그 경우, 재판 결과는 국제사회로부터도 존중받는 국제적 판례로 자리 잡을 것이다.

-현안에 대해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는 모습은 고무적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정의가 존재하는가?'라는 회의감으로 한국의 분위기는 어둡다.

▶완벽한 정의가 구현되는 사회 또는 경쟁 없이도 살 수 있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는지 여부다. 사람들은 공정한 경쟁을 하지 못하는 상황일 때 정의가 사라졌다고 느낀다. 가령, 부모의 재력에 따른 사교육이 대학 입시에 영향을 미치는 제도는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제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좌절하고 불행해진다.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는 사회제도를 만들고 개선하는 데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정의를 실천하는 길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인재들이 국제적 활약을 펼치고, 실상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은 높다. 그러나 정작 국내 상황은 어렵다고들 느낀다. 이런 괴리가 생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타 선진국들도 국내적으로는 다양한 문제들로 인해 국민들의 비판을 받으며 고민한다. 다만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얼마나 투명하게 소통하면서 국민을 설득하는지에 따라 그 괴리의 크기가 정해진다고 본다. 정책의 우선순위를 투명하게 수립해서 국민과 지속적으로 소통해야 한다. 국가가 국민을 가르친다는 식의 접근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가 유독 정치에 대한 관심이 너무 큰 것이 아닌가 싶다. 언론도 정치 이슈를 과도하게 다루며 잘한 부분보다 부정적인 면을 더 부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보는 국민들은 나라가 당장 큰일 날 것처럼 불안해지고 분노하게 되는 것 같다.

-법조인이시니 묻겠다. 국제관계나 국제법에 기반한 우리나라의 국제경쟁력을 높일 방안이 있을까.

▶우리나라 사법부의 전반적인 수준은 전 세계적으로도 상위권이다. 우리나라의 사법 시스템을 배우길 원하는 나라들도 꽤 있다. 이제 우리나라도 국제적 이슈를 주도하는 단계로 도약해야 한다. 일회성 단기적 국제사회 참여가 아니라 장기적이고 지속 가능하게 리드하는 역할이 필요하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 사법부가 아시아인권재판소 설립을 위한 논의를 주도하는 것이다. 아시아를 제외한 유럽, 미주, 아프리카에는 해당국의 주권을 존중하면서도 인권을 공동으로 보장하기 위한 국제인권재판소가 설립되어 있다. 우리나라가 아시아 전체를 아우를 인권재판소를 설립하고 정기적인 콘퍼런스까지 주도적으로 개최한다면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은 지금보다 훨씬 높아질 것이다.

-동북아 정세의 변화가 만만치 않다. 한일 위안부 합의 이슈에 대해 국제법 전문가로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좀 더 미래를 보며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도 같이 모색해야 한다.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회 차원의 인권보장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얼마 전, 제가 ICC에서 강간죄를 국제법상의 강행규범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전쟁을 비롯한 어떠한 상황에서도 여성과 어린이의 인권 및 성이 유린당한다면 사법처리 대상이 되도록 한 결정이다. 우리나라가 전쟁으로 인한 여성과 어린이의 인권유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국제 사법체계를 제도화하는 데 앞장서고, 가칭 아시아인권재판소 같은 기구 설립을 주도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과거의 아픔을 스스로 치유하고 딛고 일어설 확실한 방법이다.

-유럽, 남미, 아세안 등 국제사회는 지역별 블록화가 진행되고 있다. 국제사회에 몸담고 있으면서 볼 때 열강들 사이에 낀 대한민국의 나아갈 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19세기 말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경험했다. 이제 국내적 시각만으로 모든 것을 보려 하지 말고 국제적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는 관점의 확장이 필요하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가 국제적 관점에서는 정작 아무것도 아닐 수 있고, 그 반대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국가 경제가 국제무역에 큰 기반을 두고 있는 만큼,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도 국제적인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태도가 강화돼야 한다. 또 국제사회를 통해 이익만 얻으려 하지 말고 우리보다 발전이 늦은 나라들도 도와주는 등 국제사회에 기여해야 국가발전이 지속될 수 있다.

-판사로서 과연 법이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미래에 대한 희망이 행복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법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실현할 수 있는 국가적 제도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법조인의 역할이 당연히 중요하다. 이제 법조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시대는 지났으며, 투명하고 공정한 법집행과 법해석이 이뤄질 수 있도록 사법기관이 노력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법은 한번 만들면 바꾸기가 쉽지 않은 만큼 입법부 역시 국민의 원하는 바를 깊이 헤아려야 한다. 또한 편법과 불합리가 발생하는지 국민들도 관심을 갖고 감시할 필요가 있다.

-최근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은 미래의 희망이 없다며 체념하고 있다. 이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린다.

▶젊은이들의 그런 태도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힘겹게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한탄이지 포기가 아니라고 본다. 그만큼 미래에 대한 기대 수준이 높은 것이다.

알다시피 20세기 중반까지 우리나라 역사는 순탄치 못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광복을 맞이하면서 우리나라 발전에 장애가 됐던 신분제가 없어졌다. 이게 굉장히 크다. 유럽이나 여느 다른 국가와 비교해 볼 때 우리나라는 신분 차별이 미미한 훨씬 민주적이고 공평한 나라다. 오스트리아, 캄보디아, 헤이그를 거치면서 일하는 동안 나는 대한민국이 세계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더구나 외국에서는 한국 젊은이들의 개인적 능력과 조직 내 협업능력을 매우 높이 평가한다.

역사상 어느 때도 어렵지 않은 때가 없었다. 불공정한 환경 때문에 의욕이 상실될 수 있지만, 낙심만 하면 아무런 해결책이 없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보다 더 많은 경험을 하고, 더 많은 정보를 접하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며, 자신의 목소리를 낼 채널을 더 많이 갖고 있다. 그러니 기성세대보다 못할 이유가 없다. 나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더 잘하리라 믿는다.

◇황유선은

현 중부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연세대 불어불문과. 연세대 방송영상학 석사.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언론학 박사

스포츠조선 체육부 기자. KBS 아나운서, 한국언론진흥재단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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