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최근 증언은 주목할 만하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에 나온 그는 국정 난맥의 주원인으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목했다. 김 실장의 임명을 기점으로 국민 통합을 약속한 박 대통령이 변질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다. 대한민국을 공안 통치로 만든 주도적 역할을 김 전 실장이 했다는 것이다. 통합 대신 배제를 상징하는 블랙리스트 작성도 김 전 실장이 지시했다고 한다. 쟈니윤의 낙하산 인사 지시에 이의를 제기했을 때 김 전 실장이 했다는 말은 충격적이다. "시키는 대로 하지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며 질책했다고 한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일국의 장관을 아래 부하 다루듯 했다는 얘기이다. 김종 전 문화부 차관의 증언 역시 비슷하다. 김 전 차관은 취임 이후 김 전 실장으로부터 체육계 개혁과 관련해서 자신에게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데 그쳐야 할 비서실장이 내각의 지휘 계통을 무시하고 직접 지시를 내리는 월권을 저지른 것이다.
경험칙으로 보아 이들이 전혀 없는 일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김 전 실장만이 아니다. 조원동, 안종범, 우병우 수석비서관 등이 어떤 위세를 부렸는지 다 알려져 있다. 각 부처는 물론 민간기업들에게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유 전 장관과 김 전 차관의 사례는 아무리 부당해도 장'차관조차 대통령 비서실의 지시에 저항하지 못하는 처지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보다 하위직 공무원이나, 검찰이나 국세청 등을 두려워해야 하는 민간기업(인)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비단 이번 정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거론되는 대선주자들은 대통령 비서실이 국정 운영의 난맥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는 점을 빨리 인식해야 한다. 개헌 등의 거창한 얘기가 아니라 국정 운영의 디테일을 바꿔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우선 대통령 비서실의 기능이 불분명하다. 불분명하지 않다면 비서실의 월권을 방치하고 있는 게 문제다. 비서와 비서실은 말 그대로 대통령 개인을 보좌하는 기능에 그쳐야 한다. 청와대 비서실이 아니라 '대통령 비서실'이다. 청와대 비서실이라는 이름으로 마치 일종의 권력기관 같은 일을 하는 비서실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대통령 개인을 보좌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직접 내각에 지시하고 보고받는 등의 행위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대통령과 가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호가호위하는 행위일 따름이다. 현대판 내시들인 이른바 문고리 3인방 등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것도 다른 사람이 확인하기 어려운 대통령의 뜻을 빙자하기 때문이다.
조직 원리상으로도 지금과 같은 비서실 체제는 옥상옥이다. 모든 부처를 거의 그대로 복사하여 간섭과 통제 기능을 강화한 것은 두 개의 내각이 있는 셈이다. 장'차관을 비롯한 내각이 무력화되는 것은 이렇게 비서실이 득세하는 당연한 결과이다. 부처 관료들은 청와대만 바라보고 지시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자세가 될 수밖에 없다. 비능률과 비효율의 표본이다. 세월호 사태에서 보듯 어떤 문제가 생기면 대통령에게 모든 책임이 쏠릴 수밖에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대통령제하에서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장'차관 등 내각을 지휘하며 일을 해야 한다. 대통령 비서실은 대통령이 내각과 함께 국정 운영을 잘할 수 있도록 보좌하는데 그쳐야 한다. 대통령제의 본산인 미국의 경우 장관의 명칭이 비서(Secretary)인 점은 바로 이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악마가 디테일에 있다면 천사 역시 디테일에 있다. 청와대 비서실을 말 그대로 '대통령 비서실'로 만들기만 해도 앞으로의 국정 운영은 성공할 수 있다. 지금과 같은 대통령 비서실 체제가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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