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면서 정작 국민이 먹고사는 문제, 민생과 경제는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이런 무관심 속에서 한국 경제는 단순한 위기를 넘어 침체와 쇠락이라는 중병의 초기 단계에 들어섰다. 대구경북이 낳은 국가대표급 경제학자, 최병일 이화여대 교수를 만나 진단과 처방을 들어봤다.
-경북고등학교 출신이다. 태어난 곳도 대구인가?
▶맞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대구에서 다녔다. 많은 가족 친지들이 대구에 산다.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장을 지내셨다. 최근 4대 그룹인 삼성, 현대차, SK, LG가 탈퇴 또는 회비를 내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창립 50년이 넘은 전경련이 와해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렇게 된 배경과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하루 세끼 먹기도 힘들었던 1960년대, 경제를 키우기 위해 정부는 방향을 정했고 기업은 열심히 뛰었다. 그 끈끈한 고리를 만든 곳이 전경련이었다. 세상이 바뀌고 기업들도 글로벌화되면서 그 관계가 재정립(reset)되었어야 했는데, 정부는 여전히 기업들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언제든지 강제로 징발할 수 있다는 구시대적 사고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기업들은 세금이나 각종 규제 때문에 끌려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최소한의 저항도 하지 못한 전경련의 운영 방식이 더해져 일이 커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을 했다. 식자층 내에서는 "정권은 유한하나 재벌은 영원하다"는 말까지 나온다. 왜 이렇게 질질 끌려다니나?
▶정부에 대한 기업의 힘이 강화된 것은 맞지만, 여전히 정부는 엄청난 권력을 쥐고 있다. 면세점 운영사업자 선정, 인수합병 인허가, 세무조사, 기업 비리 수사, 형사 처벌된 기업 총수의 사면복권 등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심지어 장사가 안돼 시장에서 퇴출하고 싶은데 정부가 막고 있는 경우도 있다. 기업들은 이 같은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전경련 등을 앞세워 환경 개선을 외쳤지만, 정부가 쉽게 권한을 내주지 않고 있다.
-정치권력이 기업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현실 진단에는 공감한다. 그렇다고 재벌들이 일방적인 피해자는 아니지 않은가? 재벌들도 정권에 뭔가를 바치고 원하는 것을 챙기고 있는 것 아닌가?
▶재벌들이 항상 옳은 일만 하고 나쁜 일은 하지 않는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규제는 선순환은 막고 있으면서 규정 자체가 애매모호해 기업이 잠재적 범죄 집단이 되고 있다. 걸면 다 걸리는 규제의 구조가 문제다.
-정부는 시장에 대한 불필요한 개입을 줄이고, 기업은 윤리의식을 바탕으로 책임경영을 해야 한다는 주장 같은데….
▶맞다. 이런 이야기는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지난 30년간 정부가 바뀔 때마다 규제 완화로 투자를 활성화해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반복되어 왔다. 그럼에도 규제 건수는 오히려 더 많아졌다. 공무원들이 자기들 일자리가 줄어든다고 생각해 권한을 놓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랫목이 따뜻해지면 윗목도 따뜻해진다는 이른바 낙수 효과는 거의 사라졌다. 수출은 잘 되는데 내수는 얼어붙고, 기업은 돈을 버는데 가계의 소비 여력은 줄어들고 있다. 기존 모델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어떤 새로운 모델로 돌파해야 하는가?
▶어느 선진국도 우리처럼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에서 3만달러로 가는 과정이 지난했던 경우가 없다. 우리 경제를 끌고 가는 두 축이 수출과 내수다. 수출은 그 나름 선전해 왔는데 글로벌 환경이 보호무역으로 기울고 있어 확장에 한계가 있다. 내수를 살려야 하는데 저출산'고령화, 가계부채 급증 등으로 상당히 힘들다. 그래도 방법은 있다. 내수시장을 5천만 국민에 한정하는 시각을 바꿔야 한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2시간 내에 갈 수 있는 곳을 동심원으로 그려보면 일본의 모든 지역과 중국의 연안지역이 들어온다. 2억 명에 이르는 이 지역 사람들을 내수 활성화의 새로운 동력으로 만들어야 한다. 핵심은 이들이 매력을 느끼고 한국에 자주 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문화, 금융, 의료관광, 연예, 오락 산업을 활성화해야 한다. 프랑스의 경우 인구는 6천500만 명에 불과하지만 1년 동안 프랑스를 찾는 관광객이 8천만 명이 넘는다.
-대구는 대통령을 여러 명 배출해 정치적 자부심이 대단하다. 하지만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은 꼴찌로 1위인 울산의 3분의 1 수준이다.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킬 방안은 없나?
▶대구는 대한민국 3대 도시였다. 섬유산업의 중심지였고 교육도시로서의 위상도 높았다. 특히 국가의 지적 자산을 잉태하고 만들어내는 곳이라는 측면에서 자부심이 드높았다. 그런데 봉제업이 사양산업화하면서 대구의 산업이 공동화되었다. 이 점이 아쉽다. 섬유산업은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거듭났다.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다. 지금과 같은 글로벌시대에 중요한 것은 대구만이 가진 매력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잘 구현해 내는 것이다. 김광석 문화거리, 치맥의 본고장, 독특한 커피전문점, 대구패션페어 등 매력적인 것들이 꽤 있다. 스토리텔링 기법을 잘 활용하면 세계 속의 대구로 거듭날 수 있다.
-최근 대선주자 여론조사 1위를 달리고 있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공공 부문 일자리 81만 개 공약이 자당 내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는데….
▶괜찮은 일자리가 되려면 지속 가능해야 한다. 문 전 대표 주장은 4대강 예산 규모를 투입하면 연봉 2천∼3천만원 일자리를 그 정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인데, 매년 국민 혈세를 투입해야 한다는 점에서 지속 가능하지 않다. 특히 많은 젊은이들이 도전과 모험보다 안정적 일자리를 선호하는 현실에서 이 같은 공약은 자칫 "노량진에서 공무원 시험 준비하라"는 메시지로 들릴 수 있다.
-젊은이들이 창업하기 쉬운 제도적인 토양을 만들어 주어야지 공무원 하라고 유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하나의 창업 성공 스토리가 나오려면 100개가량은 실패해야 한다. 따라서 모든 젊은이들에게 창업을 권장할 수는 없다. 결국 대부분의 일자리는 중소기업이 공급할 수밖에 없는데, 대기업과의 임금 격차가 많이 나다 보니 청년들이 원하는 버젓한 일자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이 격차를 줄이는 것이 정부의 핵심 과제다.
-독일의 경우 '히든 챔피언'이라고 해서 중소기업인데 세계적인 기업이 많다. 이들 기업의 임금 수준은 대기업과 거의 차이가 없다.
▶독일이라는 국가에 광범위한 공동체정신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화주의와 비슷한 개념이다. 대기업이 물론 훨씬 더 많은 임금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자제한다. 반면 중소기업은 임금을 올려줄 경제적 여력이 약하지만, 종업원들을 키워야 기업의 미래가 있다는 생각에서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대기업이나 글로벌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은 더 많은 임금을 받는 것을 너무나 당연시한다. 반면 중소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은 미래가 안 보이니까 하루빨리 탈출하려고 한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한국 보수의 최대 모순은 아마도 '이익의 사유화와 손실의 사회화'가 아닌가 싶다. 세월호, 삼풍백화점 참사가 그렇고, 부실기업에 대한 공적 자금 투입이 그렇다. 최순실 게이트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걸 참보수라 할 수 있는가?
▶보수는 법치주의와 자유시장경제 등을 중요한 가치로 내세우고 있는데, 책임을 지는 자세가 약하다. 공동체에 대한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하는데, 말씀한 대로 잘되면 내 덕이고 잘못되면 우리 전체 책임이라는 적절치 않은 모습을 보여 왔다. 한국 보수는 철저히 거듭나야 한다.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부정 입학으로 130년 명문 사학인 이화여대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몇몇 개인의 일탈로 인한 우발적 참극인가, 아니면 정권과 대학의 관계라는 구조적 측면에서 비롯된 예정된 참극인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표현은 지나치다. 학교 구성원인 교수, 학생, 동문들의 저력이 있기 때문에 이화여대는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사태는 이화여대 자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한국 대학 교육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측면도 있다. 대부분의 대학들이 재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지성공동체라는 사명감 없이 5년 단임 정부의 교육부가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다. 디지털 경제의 확산으로 평생직장이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학생들의 핵심 자산 가치가 뭔지, 뭘 만들어 줄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모색이 중요한데, 그런 커리큘럼을 만드는 노력은 등한시되고 교육부가 제시하는 프로젝트를 따는 데 급급해하고 있다. 우선순위가 크게 잘못돼 있다. 이화여대 사태는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다.
-몇 년 전 들은 이야기다. 교육부의 대학 정책 담당 과장의 자녀가 결혼하는데 웬만한 4년제 대학의 총장이 다 왔다고 한다. 정부가 예산 배분 및 입학 정원 등을 쥐락펴락하니 대학이 자율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정권의 눈치를 본다. 최순실이 실세니 정유라에게 혜택을 주면 대학도 덕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이번 비극을 만들어낸 것 같다.
▶이번 사태는 다른 대학에서도 일어날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왜 하필 이화여대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구성원으로서 자괴감이 든다. 이화여대 구성원이라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사법 당국의 판단과는 별도로 우리 사회가 이번 사태에 대한 성찰을 통해 치유와 재생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어떤 치유의 길을 걸어야 하나?
▶그동안의 대학 운영 방식을 보면 속도를 지나치게 중시하고 소통은 등한시했다. 또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무시하는, 어떻게 보면 개발연대의 유산과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이런 것들을 자성하면서 새로운 130년을 여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조금 늦게 가더라도 바로 갈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리더십이 절실하다.
18대 국회의원. 연세대 객원교수
매일신문 TBC 공동기획 '신지호가 만난 사람'은 18일 오전 9시 30분 TBC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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