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싱글라이더

잔잔한 멜로드라마에 막판 반전

이병헌 내면 심리 연기 다시 기대

'싱글라이더'는 지난해 '밀정'의 대성공 이후 워너브러더스사가 두 번째로 제작한 한국영화이며 이병헌이 주연하는 가족 멜로드라마라는 점 때문에 눈길이 간다. 최근 이병헌이 등장하여 성공을 거둔 대부분 영화들이 요즘 한국영화 주류 장르의 흐름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미스터리 스릴러나 사극이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그가 선택한 멜로드라마가 어떤 것인지 몹시도 궁금해진다. 게다가 오직 연기 하나로 한국영화판을 평정하였으며 할리우드 진출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준 터라, 이병헌의 내면 심리가 드러나는 이 영화에 다시 한 번 기대를 하게 된다.

성공한 증권맨인 한 가장이 모든 것을 잃은 후, 아내와 아들이 있는 호주로 떠나게 되면서 펼쳐지는 감성 드라마이다. '싱글라이더'는 홀로 하는 여행이라는 의미이다. 이 영화로 데뷔한 이주영 감독은 각본과 연출을 모두 맡았다.

안정된 직장과 반듯한 가족, 나름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했다. 어느 날 부실 채권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재훈(이병헌)은 가족이 있는 호주로 떠난다. 그러나 다른 삶을 준비하는 아내 수진(공효진)의 모습을 보고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그녀의 주위만 뱅뱅 맴돈다.

한순간에 추락한 샐러리맨, 떨어져 생활하는 기러기 가족, 워킹홀리데이를 하며 외국을 떠도는 청년, 어영부영 놀면서 살아가는 불법체류자 등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성공을 향해서만 달려온 인생인 재훈은 영어라는 든든한 무기를 위해 가족을 호주로 보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고서 찾은 마지막 안식처인 가족이 자신이 없어도 완벽해 보이는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지켜보며 말할 수 없는 통렬한 아픔을 느낀다. 이 아픔은 인간이기 때문에 느끼는 보편적 감정이다.

여기에 영어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돈도 벌고자 외국으로 가지만 노동 착취나 사기꾼의 포획물이 되어버린 젊은 세대가 등장하여 재훈의 비극 위에 작은 이야기를 하나 더 보태어 영화 서사를 풍성하게 한다. 둘은 외로운 여행길을 함께한다. 그러나 서로 도울 길은 없다. 한 방향만을 향해 달려온 자신들을 각자 다시 뒤돌아볼 뿐이다.

안소희가 연기한 젊은 여성 지나와 재훈은 각기 세대를 대표하는 얼굴로 등장한다. 이 영화는 처음에는 현실에서 실패한 남자가 삶의 안식처를 찾으려고 떠났지만, 우리가 흔히 접하는 막장 드라마의 스토리로 전개될 가능성으로 시작한다. 그가 검은 양복에 빈손으로 시드니의 텅 빈 주택가를 배회하는 모습은 유령처럼 보인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화자는 재훈으로, 재훈의 시선에서 보는 인식과 오해로 영화가 내내 진행된다. 흔한 오해들이 영화의 초반부와 중반부를 채운다. 기러기 아내인 수진과 친밀한 친구로 지내는 백인 남자, 그리고 수진의 호주 정착 노력으로 그 오해는 더욱 증폭된다. 그러나 영화가 평범한 드라마로 치우치는가 하고 생각하는 순간, 미스터리한 장면의 삽입과 암시적인 상황들로 영화에 어떤 중요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생겨난다.

반전이 있는 영화라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를 많이 알지 않는 것이 재미를 위해 좋다. 현재 재훈의 기억 속에 섬광처럼 과거의 장면들이 떠오르고, 이는 지금의 재훈과 그의 가족을 있게 하는 단서로 작용한다.

영화는 생활과 죽음, 성공과 실패, 정착과 여행이 삶의 한 단면들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비극적인 이야기이며 마지막에 가서는 큰 충격을 받게 되지만, 그렇게 슬프게 여겨지지 않는다. 거대한 좌절과 실패는 세상의 또 다른 면을 보게 하는 기회가 됨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떠돌고 떠돌다 사람이 없는 아름다운 섬의 벼랑에서 지켜보는 바다와 하늘은 유달리 축복으로 느껴졌다.

휘몰아치는 감정의 파고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는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여기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생생한 현실의 드라마로 만든 것은 연기의 덕이 크다. 이병헌은 역시 명불허전의 연기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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