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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김동리 '황토기'와 역사적 허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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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동리
소설가 김동리

1939년 조선은 유달리 가뭄이 심했다. 양쯔강에서 매년 5월 저기압이 발생하면 그 영향으로 조선 전역에 비가 내렸지만, 그해에는 그렇지 못했다. 언론은 수십 년 만의 대가뭄에 대해서 연일 보도했고, 극심한 흉년이 이어졌다. 중일전쟁 준비로 일제의 수탈이 심해진 상황에 흉년까지 겹치자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극심했다. 바로 그해, 일제는 조선인의 성씨를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까지 시행했다. 이광수가 자신의 이름을 '香山光郞' 즉, 가야마 미쓰로라는 일본이름으로 바꾼 것도 이때였다. 조선 사회 전체가 메말라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 시기를 전후하여 "숲 사이로 푸른 별이 드나들고/흰 물결이 숲을 비껴 흐"르는 것과 같은 비현실적인 목가적 풍경('월견초 필 때', 1939)을 다룬 시나 소설이 유달리 많이 발표되고 있었다. 사람들 모두 희망 없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서 벗어나 위안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시인이나 소설가 역시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식민지가 된 지 이미 20년의 세월이 흘렀고 독립을 위한 크고 작은 움직임들은 모두 실패로 돌아간 때였다. 땅만 메마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열정 역시 당연히 메말라갔다. 김동리의 '황토기'(1939)는 이와 같은 현실 속에서 발표된 소설이다.

'황토기'는 소설 전면에 피가 흥건하게 고인 채로 시작한다. 용이 흘린 피가 흙을 붉게 적셔서 황토골이 되었다는 섬뜩한 전설을 배경으로 끝도 없이 반복되는 억쇠와 득보, 두 장수의 힘겨루기가 소설 내용 전반을 이루고 있다. 물론 두 여성, 분이와 설희가 등장하여 이 두 남성과 복잡한 애증 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애증 관계에서 비롯되는 질투의 감정 역시 억쇠와 득보의 힘겨루기를 위한 하나의 자극제로 작용할 뿐 그 감정 자체가 핵심적인 것은 아니다. 서로 만나서 짐승처럼 물어뜯으며 피를 철철 흘릴 정도 격렬하게 싸우면서 힘을 소진시키는 것, 그것이 싸움의 목적이었고, 이 두 남성의 삶의 근거였다.

억쇠와 득보는 타고난 자신들의 힘을 왜 이처럼 무의미하게 소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 불뚝 불뚝 솟아오르는 힘을 쓸 곳이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무의미한 힘겨루기를 반복하는 두 주인공의 비극적 운명은 힘을 써서 이루어야 할 국가도, 미래도 가지지 못한 식민지 조선인의 운명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가혹한 운명 속에서도 독립을 이루고, 미래를 만들려고 힘을 쓰던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다. 공공의 선(善)을 위해 피를 흘린 그들의 '선한' 의지를 생각한다면 '황토기'를 채우는 흥건한 피는 안타까울 정도 무의미한 것이었다.

최근 대통령 측 대리인 중 한 명이 "탄핵이 인용되면 아스팔트가 피바다가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자 수백 년 전 영국 크롬웰까지 거론했다고도 한다. 그의 역사에 대한 판단의 옳고 그름을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다. 화합과 소통을 통해 '미래'를 열어가야 할 이 시점에 '피바다'를 거론하는 자체가 시대와 인간과 역사에 대한 그의 인식의 깊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의 모습을 보면서 역사적 허무주의에 빠져 '피'의 무의미한 방출밖에 그려내지 못한 김동리의 한계가 새삼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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