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내 이름은 이정미

전 MBN 앵커
전 MBN 앵커

1982년 10월의 어느 날에 태어난 제게 부모님은 아름답고 곧게 자라라며 이정미(李貞美)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이정미'는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고 특별한 존재일 것만 같았죠. 그런데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크게 실망했습니다.

전 학년에 '이정미'가 일곱, 같은 학년에 '이정미'가 셋, 심지어 같은 반에 '이정미'가 둘이었거든요. 초등학교뿐 아니라 중고등학교를 가서도 수많은 '이정미'와 만났고, 저는 그저 숱하게 널린 '이정미' 중 하나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만화 속 주인공 이름처럼 예쁘지도 않고 몇 번을 들어도 기억에 잘 남지 않는 '이정미'라는 이름이 전 정말 싫었습니다.

불과 몇 달 전에는 개명을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계획했던 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답답한 마음에 이름이나 바꿔볼까 마음먹었죠. 실제 개명을 하고 시험에 합격한 친구도 있고요, 개명한 다른 친구는 이후 사업이 대박 났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희망을 한번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최근 경제가 어렵고 취업도 워낙 힘드니까 저처럼 개명을 통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고 하더군요. '이름은 운명을 좌우한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좋은 기운을 담은 특별한 이름을 받으면 그 이름처럼 특별한 인생이 펼쳐지지 않을까 기대했죠.

그런데 그때 이름을 바꿨다면 지금 얼마나 후회하고 있을까요. 2017년 3월 10일 11시 22분. 평소 돌덩이처럼 조용하던 휴대전화에 갑자기 메시지가 빗발쳤습니다. 가까운 친구부터 고향 선후배, 몇 년 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구의 이름까지 발신자에 찍히더군요. '이정미 만세' '자랑스럽다 이정미' '진짜 멋지다 이정미'. 메시지엔 하나같이 '이정미'를 칭송하고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받는 이가 분명 필자 '이정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폭탄 문자의 진짜 주인공인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과 단순히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저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이며 자부심이 생기더군요. 일면식도 없는 그녀가 가깝게 느껴지면서 각종 언론과 포털 검색어에 이름이 오를 때마다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이 권한대행의 동명이인으로서 영광을 맘껏 누렸습니다.

요즘은 이 권한대행 덕분에 버리고만 싶었던 내 이름이 자랑스러워졌습니다. 특히 헌정 사상 처음인 대통령 탄핵 선고 당일 아침, 이 권한대행의 뒷머리에 말린 분홍색 헤어롤은 핫이슈로 떠올랐죠. 해외 언론에 사진까지 실렸더군요. AP통신은 "헤어롤 해프닝은 이 권한대행이 판결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 보여주는 신호"라면서 "한국의 일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투영된 한순간이었다"고 보도했더라고요. '이정미'가 대한민국 여성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인물로 명예롭게 기록되는 장면이었죠.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께 "이정미라는 이름을 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까지 했다니까요.

이 권한대행의 과거 인터뷰를 보니 그녀가 헌재의 최연소 재판관으로서 여성 법조인으로서 워킹맘으로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도 혼란스러운 이 시국에 대한 걱정과 고민뿐이라는 마음이 전해졌습니다. 퇴임사에 담긴 말씀처럼 지금은 아픔이 클지라도 헌법과 법치를 통해 성숙한 민주국가로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저도 믿고 싶습니다.

폭풍우 치는 바다의 한가운데서 이제 자연인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래서 여자는 안 돼"라거나 "다시 여성 지도자가 나올 일이 있겠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줘서, 올림머리로 실추된 국격을 헤어롤로 상승시켜줘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 흔해 빠진 '이정미'들을 전 세계가 기억하는 특별하고 대단한 '이정미'로 만들어 줘서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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