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성불산 고성' 이름 찾아야

허물어진 고산성은 세월에 잊힐까 문화재로 지정됐다. 어디든 문화재 명칭엔 그 옛날 산 이름을 나란하게 붙여 놨다. 하지만 앞산(성불산)은 문화재 지정 때도 흘려버린 듯 본시 산 이름이 아닌 데다 문화재 명칭도 산 이름과 완전히 다르다. 큰 뫼(山)에 솟은 여러 산마루는 봉(峯)이 된다. 가창에서 달비골까지 아우른 성불산을 볼 테면 봉우리마다 산성산'월배산'대덕산을 따로 붙였다. 어디까지나 성불산의 봉우리일 뿐 각개 산이 아닌데도 말이다. 고산자 김정호는 현풍현 지도에서 포산을 비파산으로 표기했는데 앞산 능선 중턱에도 어이없이 비파산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대구부 산천 조에 성불산이 기록됐다. 성지 조에 성불산 고성은 "수성현 서쪽 10리에 있다"고 했다. 돌로 쌓아 둘레가 무려 3천51자(尺)다. 짧지 않은 길이에 끝자리 숫자 1척마저 빼놓지 않았다면 정확한 실측이다. 성불산은 그로부터 '교남지'에 이르기까지 줄곧 400여 년간 많은 고문헌에 기록됐다. 어느 도서는 수성현의 '성불산 고성'을 법원 뒷산이라고 엮어 썼다. 가당찮지만 속는 셈치고 둘러봤고 혀를 찼다. '대구읍지'와 '교남지' 등 기록에 성불산은 관기안산이자 비슬산의 맥이며, 팔공산과 맥을 잇는 연귀산도 기록했다.

특히 '교남지'는 소화 15년, 즉 일제강점기인 1940년까지 발행하면서도 산 이름은 똑똑하게 남겼다. 그로부터 50년도 채 넘지 않은 1988년 5월 30일, '성불산 고성'을 기념물 제7호로 지정하면서 산 이름은 어디에서 따왔는지 문화재 명칭은 '대덕산성'이다. 성불산을 두고 대덕산이라니! 고문헌과 고지도를 두루 섭렵해 봤지만 이 산이 대덕산이라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2007년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원에서 조사한 산성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해발 500~600m까지 능선은 남동성벽, 동북부 300~470m에서 북서부 약 400~500m의 완만한 사면에는 석축을 쌓은 흔적으로 약 850m에 유구가 산재하며, 약 2㎞는 석축이 곤란한 암괴, 암벽과 급사면이 많아 자연요새를 성벽으로 이용하고, 성벽의 폭은 약 2~2.2m, 성벽 기층 폭은 7척으로 설계된 것으로 생각된다"고 했다. 또 삼국시대 산성의 특징을 많이 가진 것으로 판단했다.

필자는 '성불산 고성'에 자주 들른다. 위 보고서가 토대다. 안일사에서 동쪽으로 가로질러 충혼탑을 지나면 소능선을 만난다. 계단 따라 전망대로 올라가 케이블카와 능운정을 거치면 최고봉이다. 거기서 왕굴 능선으로 내려가면 평평한 건물지가 있고, 한데 모아 놓은 기와 조각도 수북하다.

산 이름은 애초 토착민이 부르고 쓴 게 모태다. 1770년에 제작된 '조선지도' 산 이름 역시 그랬다. 예컨대 경기도 여주의 '북성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산성에서 비롯됐다. 전국 12곳의 '성산' 또한 산성이 바탕이다. 김포 읍치의 북쪽 산도 북성산인데 인조가 읍치를 옮기고 아버지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묘를 천장해 능호를 장릉으로 붙여서 장릉산으로 고쳐 불린다.

왕건이 숨었던 은적굴은 은적사에, 왕굴은 안일사 위쪽에 있다. 왕건의 자취 따라 '비슬산 은적사'안일사'임휴사'를 세웠다. 다른 사찰도 범종에 '비슬산' '성불산'을 새겼고, 현판에도 써넣었다. 고산성은 발굴과 복원이 대세다. 성불산 고성에도 망루 터에 방루 원형 석조까지 보고됐다. 3천51자 성불산 고성은 지금 우리 곁을 떠나 있다. 복원은 물론 애당초 산 이름도 되찾고, 문화재 명칭도 '성불산성'으로 고쳐줘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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