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반딧불을 밝혀야겠다/박성규 지음/문학의전당 펴냄
2004년 '시인정신'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박성규 시인이 10번째 시집 '이제 반딧불을 밝혀야겠다'를 펴냈다. 오랜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시인은 '자연'을 프리즘 삼아 사람살이와 자신을 들여다본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시인의 '동심(童心)'이다. 그렇다고 시인의 '동심'을 '어린이처럼 순진한 마음'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가령, 다음과 같은 작품은 얼핏 아이들의 눈에 비친 세상 같지만, 아이들이 연상하기엔 너무나 뚜렷하고 깊은 삶의 주름에 관한 것들이다.
'무논에/ 갓 입학한 신입생들/ 조회하려고/ 줄지어 서 있네.' -모내기- 전문.
'빈집털이 전문가가/ 동네 근처에 왔단다/ 제비에겐 방 한 칸/ 세 주는 한이 있더라도/ 집은 절대 비우지 말아야 한다/ 오죽하면 통장님이/ 쉰 목소리 가다듬은 방송으로/ 문단속까지 당부하실까/ 뻐꾸기가 울면/ 집을 비우지 말아야 한다/ 까닭일랑 묻지 말고.' -뻐꾸기 울던 날-
시인은 '농담'을 즐겨 동원한다. 가볍게 툭 던진다.
'바다에서 세수했다며/ 토함산 위로 떠오른 달/ 몰골이 희멀겋다/ (중략) 아무리 봐도/ 몰골이 수상하다/ 바다 건너편에서/ 자다가 일어났나 보다/ 그렇지?/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도 퉁퉁 부을 순 없지.'-슈퍼문-
박 시인에게 농담은 실없는 장난이 아니다.
'친구 하나를 먼저 보냈다/ 뱃놈이었다/ (중략) 장생포 앞바다 속이 궁금하다고 들어간 후/ 몇 며칠 나오지 않더니만/ 바다 속을 실컷 구경하고 나와서는/ 영정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차피 갈 곳이지만 먼저 보냈다/ (중략) (함께) 술잔을 비우곤 했던 녀석의 영정과 마주앉아/ 술잔을 들려니 목이 맸다/ 짜스기 마랴(자슥이 말이야)/ 나한테 절 받고 싶어서/ 그랬던 거 같다.' -짜스기 마랴-
문학평론가 박지영은, 시인은 '짜스기 마랴/ 나한테 절 받고 싶어서/ 그랬던 거 같다'고 친구의 죽음을, 오열을 웃음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말한다. 또 죽음의 연유에 대해서도 '장생포 앞바다 속이 궁금하다고 들어간 후 몇 며칠 나오지 않았다'고 남 이야기하듯 말한다고 짚고, '이런 점은 시인의 시 쓰기 장점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하다. 슬픈 것을 슬프지 않게 낯설게 말함으로써 울림을 주고, 시에 농담을 활용함으로써 독자의 긴장을 해소시킨다'고 설명한다.
시인은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따지거나 투정하지 않는다. 또한 사람살이에 그림자처럼 따르기 마련인 슬픔이나 고통, 외로움을 직접 드러내 말하지 않는다.
'심을 시기 놓쳐서/ 어렵사리 심은 감자/ 하얗게 꽃 피웠네/ 어여쁜 꽃을 꺾는다는 것/ 가슴 아픈 일이지만/ 아버지 말씀을 따르자니/ 어쩔 수 없었네/ 이치가 그렇다 하니/ 어쩔 수 없었네.'-순리-전문
'집을 나서면/ 가방부터 들쳐 멘다/ 이건 습관이다/ 아낙네들 손가방처럼은 아니지만/ 폼 잡으려는 건 아니다/ 가방을 메면 등이 따뜻하기 때문이다/ 기댈 곳 없었던 타향에서/ 내가 나에게 기대기 위해 메었던 가방'-가방-
등단 13년 동안 10권의 시집을 펴냈다면 상당한 다작이다. 문학평론가 박지영은 '그가 시를 계속 써왔다는 것은 시 쓰기의 즐거움을 터득했고, 시를 쓰면서 언어적 향락을 끌어내어 즐길 줄 안다는 의미다'라고 말한다. 글쓰기 기술로 시를 쓰는 것은 아니니, 이만큼 많이 펴냈다면, 그만큼 우물이 깊다는 말일 것이다.
시집 제목 '반딧불'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반딧불이처럼, 빛을 내는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다는 시인의 의지를 담은 것이다.
115쪽, 9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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