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중세시대의 이발사, 외과의사 역할 함께했다"…『천년 그림 속 의학 이야기』

천년 그림 속 의학 이야기/ 이승구 지음/ 생각정거장 펴냄

'종합병원'부터 '닥터스' '낭만 닥터 김사부'에 이르기까지, 의학 드라마는 이제 안방극장에서 익숙한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의학 전문용어가 주는 심리적 거리감이 로맨스나 코믹으로 상쇄되면서 의료인이 아닌 일반인의 지식수준도 함께 높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병원은 멀리할수록 좋고, 의사는 차가운 느낌이며, 의학은 어려운 학문이다.

'천년 그림 속 의학 이야기'는 그림을 매개로 의학에 접근한다. 저자 이승구 박사는 전 세계 유명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에서 찾은 명화, 삽화, 벽화, 조각, 고서(古書) 등에 묘사된 의학사의 단편을 소개하며 수천 년 예술에 담긴 의학의 실수와 오류를 짚어본다. 현재 관점에서 보면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의술과 환자의 희생을 통해 의학이 발달했다고 말한다.

수혈은 인체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과거의 치료법 가운데 가장 안타까운 결과를 낳은 경우다. ABO식, RH식 혈액형의 발견이 있기 전까지 수혈은 목숨을 건 치료법이었다. 17세기 한 판화를 보면 환자의 팔에 관이 꽂혀 있고, 그 관은 개와도 이어져 있다. 인간과 동물 간에 수혈됐다는 뜻이다. 건강한 혈액을 이용해 늙거나 병든 사람에게 생기를 부여한다는 인식만 있던 시절, 양, 개, 오리, 송아지의 피를 환자에게 수혈했고, 일부 성공 사례를 제외하고는 환자 대부분이 사망했다. 인간의 몸에 다른 혈액형의 피가 들어오면 피가 응고돼 급성 신부전과 심장 이상의 합병증을 일으키고 환자는 죽는다. 동물 피는 사람 피와 질적으로 다르고, 인간 사이에서도 수혈자와 공혈자의 혈액형이 다르면 항원-항체 반응이 생긴다는 건 상식처럼 알려졌지만, 당시에는 이런 사실을 몰라 희생을 치러야 했다.

불과 15, 16세기만 해도 유럽에 외과학이라는 분야가 없었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고대'중세 시대에는 이발사가 외과의사 역할을 함께 했다. 그래서인지 수술을 해야 하는 외과의사의 역할은 천한 일로 치부됐고, 이발과 외과적 수술이 이발소에서 벌어지는 등 위생 관념이 없었다. 이발사'외과의사 조합이 분리되어 외과의사들이 독립적인 지위를 얻은 건 1745년이었다. 내과학 그늘에 가려졌던 탓에 소독과 수술법의 발달도 늦어졌다. 19세기만 해도 수술방은 개방돼 있었고, 자유 견학이 가능했다. 마취는 물론 수술 기구 소독도 없어 감염 예방 조치도 없었다. 수술 후 감염으로 죽은 환자가 부지기수였다. 위생 관념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진 무모한 수술이었지만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외과 수술의 수준은 점차 높아졌다.

책에 따르면 병원은 중세 기독교의 종교적 자선을 위해 건립됐다. 중세 시대 의료는 귀족들만의 특권이었고, 병원은 진료보다는 수용 시설에 가까웠다. 현대적 의미의 병원은 18세기 프랑스 시민혁명과 영국 산업혁명 이후에 모습을 갖췄다. 병원과 환자 수는 늘면서 환자 간호는 수녀 대신 잡역부의 몫이 됐고, 병원은 비위생적이고 비인도적 상태로 악화했다. 백의(白衣) 천사 나이팅게일이 병원 개혁, 간호사 직제 확립을 한 것도 이후의 일이다.

환자의 개념도 바뀌었다. 중세 때 질병은 악마의 소행으로 여겨졌다. 정신병에 걸린 여자를 마녀로 몰아 고문하고 화형에 처하는 일도 많았다. 인체 해부학을 바탕으로 생리학'병리학'내과학'외과학이 발달하면서 질병에 대한 관념이 바뀌고 환자에 대한 인식도 변했다고 한다.

책은 지나쳤던 그림 속 의학 이야기 외에도 작가의 병력, 작품을 만들 당시 상황이 그림에 어떻게 반영됐는지도 살펴본다. 정신병을 통한 해석이다.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절규' '골콘다' 등을 통해 빈센트 반 고흐, 에드바르트 뭉크, 르네 마그리트 등 예술가의 삶을 조명한다. 그들이 가진 정신적 장애가 예술적 성취를 가져왔다는 해석이다.

의학은 수천 년 동안 갖은 실수와 오류를 저질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환자가 희생됐다. 의학사를 증언하는 그림에는 안타까움과 잔인함, 감동이 모두 담겨 있다. 허점투성이 의학은 연구와 실습으로 현재에 이르렀고, 미래에 닿아 있다.

이 책은 고대 벽화, 파피루스 조각, 중세 필사본, 근대 명화, 의학 교과서의 삽화들을 두루 살핀다. 그림에는 의학의 잔인한 실수, 그리고 미래를 향한 다양한 노력이 담겨 있다. 평생 정형외과 전문의로 활동해온 저자가 전해주는 이야기와 그림들은 때로는 안타깝고 잔인하며, 또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의학 역사는 인류의 생로병사와 관련된 이야기이자 인간 자체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로봇 수술 활성화, 3D 의료기기 개발, 질병 유전자 조기 검색 등으로 기대수명 100세 시대가 머지않았지만 불멸의 생명체는 없다는 점에서 책이 전하는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그림 속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최첨단 기술이 어떻게 진화할지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296쪽, 1만6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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