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문학노트] 정호승의 <그리운 부석사>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정호승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摩旨(마지)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정호승, 전문)

푸른빛이 감도는 예쁜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늦은 봄날 햇살 아래에서, 분홍빛으로 아름다운 문자들을 안은 정호승의 시집을 읽었다. 비록 지나간 시간 속에서 색이 바래가지만 기다림과 슬픔, 그리움, 사랑 속에서 길을 걸었던 시간들은 여전히 그 시간에 머물러 숨을 쉰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어떤 나이도 처음 살아보는 나이라서 나는 여전히 삶에 서툴다. 많이 걸었기에 이제는 익숙할 거라 생각했지만 여전히 내가 걸어가는 길은 서툴다. 길은 아직도 저만치에서 휘돌아가고 있고 나는 아직도 그 길의 가장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생각에 아쉽기만 하다. 물론 앞으로도 길의 가장자리만을 맴돌지도 모른다.

부석사는 이별의 시간을 품고 있는 공간이다. 어긋남의 기억을 지닌 셈이다. 기억이 장소에 따른 호불호(好不好)를 완전히 결정하진 않는다. 삶의 어긋남은 필연적인 일이고, 그로 인해 남겨진 기억과 존재의 흔적들만 서랍 속의 낙서처럼 굴러다닌다. 안타깝지만 언젠가는 올 수밖에 없었던 그날 그 시간. 기억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람의 기억이란 게 컴퓨터와는 다르다. 지워버리고 싶지만 인간은 'Delete' 키 하나로 모든 기억을 지울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불가해한 존재이며, 불편한 존재이며, 불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전히 부석사는 그리운 장소다. 단지 떠난 자보다는 남은 자들의 그 장소에 대한 기억의 불편함이 존재할 뿐이다. 알면서도 잘못된 길을 선택하고, 알면서도 쓸데없는 안타까움을 갖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이다. 벗어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욱 다가가는 아이러니. 그게 사랑을 앞에 둔 모든 존재들의 쓸쓸한 풍경이다.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삶에는 많은 틈이 생긴다. 원래 바람이 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틈에서 바람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 틈이 여유를 만들고 또 다른 사랑을 만든다. 끝은 시작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 떠난다는 사실은 필연적으로 다른 만남을 예비한다. 중요한 것은 떠나고 만나는 그 상황에 집착하지 않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과의 사랑 그 자체에 집착하지 않는 일이다. 이미 변함이 전제되어 있기에 사랑에 집착하는 순간 사랑은 환멸로 다가온다. 그 순간 우리 삶에서 사랑이 사라진다. 그건 아주 슬픈 일이다. 사랑만이 삶이라는 깊고 오래된 상처를 소독해 줄 유일한 거즈니까 말이다.

부석사에 가고 싶다. 이제는 불편한 기억보다는 소백산 너머로 사라지는 저녁 햇살처럼 풍경을 풍경 그 자체로 사랑하고 저장하고 싶다. 뜰의 벚꽃이 막바지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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