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동이 멈춘 농기계가 내 손이 닿자마자 경쾌한 엔진 소리를 내며 잘 굴러가는 것을 보면 '기술 배우기를 참 잘했구나' 하는 자부심과 함께 희열, 보람을 느낍니다."
농업기계 명장 윤태호(68) 씨는 농기계 고장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농민을 도와줘 '제때 일을 마칠 수 있었다'며 인사를 들을 때면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특히 힘든 농민들을 돕는 것이 즐겁다고도 했다. 윤 명장은 "농기계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자신 있다"면서 "앞으로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떤 일이든 적극적으로 돕고 싶다"고 했다.
◆'기술을 배워라'
윤 명장은 6'25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경남 진주에서 7남매 중 둘째(장남)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진주에서 큰 공장을 할 정도로 잘살았지만 전쟁 때 포격으로 공장이 부서지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설상가상 아버지마저 행방불명됐다. 여수로 이사 간 윤 명장은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3학년 때 다시 진주로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윤 명장에게 "너도 아버지처럼 훌륭한 기술자가 되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했다. 윤 명장은 두말 않고 "그러겠다"고 했다. 중학교 3학년, 16세 때였다. 그래서 윤 명장의 학력은 중학교 중퇴가 전부다.
윤 명장이 입사한 회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경운기를 생산한 대동공업. 처음에는 고철을 사러 다니는 선배를 따라다녔다. 1년 뒤 부품이 녹슬지 않도록 칠해둔 기름을 세척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엔진과 미션 조립, 정비 기술을 배웠다. 윤 명장은 아버지처럼 훌륭한 기술자가 되리라 다짐하면서 열심히 기술을 배우고 익혔다. 그런 집념으로 선배로부터 재능도 있고 기술 습득이 빠르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당시 특별히 가르쳐주는 이는 없었다. 선배들 어깨너머로 배웠다. 해보니 '나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이 들었다"고 했다.
회사는 그런 윤 명장에게 엔진'미션 조립에 정비 일까지 맡겼다. 공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해보고 싶었던 윤 명장에겐 기회였다. "정말 열심히 했다"고 했다. 당시 윤 명장은 해보고 싶은 일이 있었다. '용접'이었다. 용접 부서에 지원했다. 그러나 용접 부서 책임자는 윤 명장이 여러 부서를 옮겨다닌다는 이유로 하루 종일 해머질만 시켰다. "1년이 넘도록 해머질만 했다. 오후가 되면 힘이 빠져 해머가 목표물을 빗나가기도 했다"며 당시의 고충을 털어놨다. 일에 대한 집념이 남달랐던 윤 명장은 용접 기술 습득도 빨랐다. 산소용접에 이어 에어탱크를 용접하는 기술을 익히는 데도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여러 부서를 옮기면서 윤 명장의 기술력은 더욱 공고해져 갔다.
몇 년 뒤 조립 부서에서 발전기와 선박 엔진 조립 라인에서 일했다. 마침내 윤 명장은 조립과 시운전, 정비 기술을 모두 가진 명실상부한 기술자가 됐다. 그리고 군에 입대했다.
◆50세 출전한 기능경기대회서 최우수상, 그리고 명장
군 복무 후 전남 영암'함평에서 농기계 수리센터를 차렸다. 그의 기술은 금방 입소문을 타고 고객이 몰려들었다. "2년 정도 했는데, 잘됐다. 돈도 벌었다"고 했다.
대동공업으로부터 '대리점이 생기면 우선적으로 주겠다'며 입사 제의가 들어왔다. 다시 조립 부서에서 일했다. 회사는 조립과 시운전, 정비 경험이 있는 그에게 품질검사(QC)를 맡겼다. 생산한 제품을 검사하는 일이었다. 중책이었지만 성실히 그 일을 수행했다. 회사는 그의 기술과 성실함을 인정해줬다.
1976년, 대구 동구 신암동에 대동공업 경북영업소가 문을 열었다. 영업소는 대구경북 지역에 농기계'부품 판매, AS를 주로 했다. 윤 명장은 정비와 기계 조작 방법 및 기술교육, AS 등을 담당했다. 1989년 대동공업이 본사를 대구(달성공단)로 옮기면서 윤 명장은 고객지원팀(CS팀)에 발탁됐다. 이론에 밝고 경험이 많은 윤 명장은 정비를 손쉽게 할 수 있도록 정비 매뉴얼을 만들어 영업소에 보내주는가 하면 정비에 필요한 부품과 장비를 지원했다. 그리고 버려진 농기계와 폐기름을 마을 단위로 수거하는 일도 주선했다.
그러면서 전국 순회 농기계 수리 봉사에도 참여했다. 농기계 조작과 관리를 지도하는 한편 '돈 들여 새 기계를 구입하지 말고 고쳐 쓰면 된다'며 고장 난 기계를 수리해 줬다. 윤 명장은 "당시 농민들 사이에 '윤 기사'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며 빙그레 웃었다. "회사와 농민들을 위해 정말 성심을 다했다"고 했다.
윤 명장은 1996년 경북영업소가 화원에 오픈하면서 AS팀에 근무하게 된다. 농기계를 수리해 주면서 농촌 현장에서 일어나는 불만과 애로 사항, 개선할 점 등을 회사에 건의하는 일을 했다. 그러면서 트랙터와 콤바인, 이앙기, 바인더 등 새로 생산한 농기계 조작 기술을 농민에게 교육하는 일도 맡았다. "힘들게 일하는 농민을 돕는 일이 재미있었고, 무엇보다 보람이 있어 즐겁게 일했다"고 했다.
윤 명장은 1999년 또 한 번 일을 저지른다. '경북지방기능경기대회'에 출전해 농기계 부문 최우수상을 받은 것. 당시 나이 50세, 다들 비웃었지만 윤 명장은 출전 신청을 했다. "신청은 했지만 '떨어지면 어쩌나' 하며 엄청 불안했어요. 그러나 과제를 제출하고는 안심했어요. 잘했거든요." 윤 명장은 생애 처음으로 농기계 정비 2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금메달을 받자 주위 시선이 달라졌다 "저 자신도 기뻤지만 후배들에게 귀감이 됐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흐뭇했다"고 했다.
윤 명장은 이후에도 맡겨진 업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그리고 1년여 준비 끝에 2000년, 농업 기계 부문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됐다. 회사와 선후배, 주위 사람들로부터 축하 인사를 수도 없이 많이 받았다. "그동안 열심히 일해온 것에 대한 보상과 뿌듯함, 이 분야의 최고라는 자부심 등… 정말 기뻤다"고 술회했다.
◆농민에 기술 지도하고 싶어
윤 명장은 2007년 대동공업에서 퇴직했다. 요즘은 강의와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윤 명장은 호산대 석좌교수로 기술 지도를 하는 한편 명장회와 숙련기술회 회원으로 농기계 순회 수리 봉사를 하고 있다. "아직도 국가나 사회, 특히 농민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뿌듯하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기술을 잘 배운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윤 명장은 40여 년 기술 인생에 대해 보람이 있으며 농민들을 대상으로 일한 것이 의미가 있었다고 했다. 앞으로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건 발벗고 나설 것이라고 했다. "기술을 배운 게 정말 잘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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