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16>-엄창석

"소남공은 돈을 얘기한 겁니다. 돈은 높은 곳에서 낮은 데로 흐르는 물과 같은 거지요. 물길이 막히면 바위를 부수고 산도 무너뜨려요. 칼로써는 만리장성을 허물지 못하나 돈은 그것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서석림이 장죽을 놋쇠 화로에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과거를 떠올리는 듯 시선을 허공에 두고 이맛살에 주름을 지었다. 열한 살 때부터 상인들의 심부름을 하여 장삿술을 익힌 뒤 불과 마흔 살에 엄청난 규모의 보부상 조직을 거느리며 낙동강 무역을 휘어잡았으니까 온갖 파란을 겪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일우에 대한 김광제의 말은 어딘가 맞지 않았다. 곁에서 잠자코 있던 서병오가 찻잔을 입술에 적시며 입을 뗐다.

"우리가 신교육운동을 하고 있지만 문명이 전부가 아닐 거요. 전에는 서방에서 기(己)를 얻고 우리의 도(道)를 지키자 했으나 이젠 아무도 그런 말을 입 밖에 꺼내지 않습니다. 전기, 전차, 기차, 전화, 이런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어요. 지금 이것이 전부 일본을 통해 들어오고 있으니,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침입을 거부하기가 어렵습니다."

서병오의 말에 방 안이 잠잠해졌다.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침입은 거부한다는 논리적 모순에 공감한다는 게 아니라 바로 그 때문에 지난 수십 년을 피 흘린 무수한 사건을 떠올리는 표정이었다.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김광제가 목소리를 높였다.

"문명과 침탈의 모순을 이겨내고자 나온 게 양계초의 '신민설'입니다. 서방 제국주의가 필연적으로 도래한 거라면 우리도 공공의 정신을 가진 신민(新民)을 키워야한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현실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침입을 막는 것과 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의 경계가 어딥니까? 침입도 막고 기술력도 얻을 수 있는 균형점이 어디인가요? 그 균형점을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우리가 분열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왼쪽으로 더 가야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오른쪽으로 더 옮겨져야 백성이 산다고 주장합니다."

서병오가 투덜대듯 내뱉었다. 좌중이 수런거렸다. 아무도 드러내놓고 그 말에 답변하지 못했다. 몇은 장죽에 연초를 얹거나 화로를 뒤적였다. 몇은 찻잔에 홍차를 부어 마시기만 했다. 그것은 균형점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문명을 얻되 침입은 피할 수 있는가 하는 난제가 갑자기 등장한 균형이라는 말로 인하여, 마치 해결이 된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그 지점이 어딘지 답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봐, 여기 중(中)자와 여(呂)자가 거꾸로 박혔잖아."

권종성이 계승의 어깨를 툭 쳤다. 열린 장지문으로 옆방을 힐끔대면서 조판을 짜던 계승이 끔쩍 놀랐다. 손톱 반쪽만 한 활자가 잘못 놓여 있었다.

"정신을 어데 팔아. 글자가 틀리면 누가 이 책을 믿고 보겠소? 옛날에는 한 자를 잘못 꽂으면 곤장 서른 대를 맞았어."

계승은 조판틀을 풀고 활자를 바로 세웠다. 한문을 능숙하게 읽지 못해 형태를 보고 활자를 넣다가 실수를 한 것이다. 원고인 '소물리학'에 한문과 한글, 숫자와 선이 섞여 있어 판짜기가 무척 더뎠다. 선과 선 사이의 벌어진 공간에 적당한 크기로 나무를 채워 넣어 압지를 할 때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권종성이 말했다.

계승은 해가 기웃할 즈음에야 한 판을 완성했다. 권종성이 인쇄기에서 나온 교정쇄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계승이 짠 조판을 실로 단단히 묶어 고정을 시켜주었다. 인쇄는 내일 하자고 했다. 조금만 어두워도 잉크가 고루 먹는지, 활자가 비꾸러지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옆방에 있던 사람들이 일어나면서 인쇄실로 얼굴을 잠시 내밀었다. 광문사 부사장인 서석림이 저녁을 사먹으라며 신화(新貨) 반 원(半圜,50전)을 두고 갔다. 관청에서는 신화를 쓰라고 하지만 식점에서는 엽전을 선호했다. 신화는 화폐가치가 변한다고 해서 받기를 꺼려했다. 화폐가치가 변하는 건 엽전이지만 어차피 서로 교환하는 것이어서 어느 한쪽을 쓰더라도 가치변동이 생길 수밖에 없는 셈이었다. 신화 반 원은 엽전 5냥에 해당됐다. 다섯 명이 밥을 먹고 술도 마실 수 있는 넉넉한 돈이었다.

계승은 직원들과 함께 남문 밖에서 저녁을 먹고 혼자 광문사로 돌아왔다. 약간 취해 있었고 피로가 머리끝까지 차 있었다. 꽤 늦은 시간이었다. 사방이 적막했다. 멀리서 부엉이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계승이 툇마루 밑으로 뚫린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잠을 자려고 인쇄실 뒷방으로 들어갈 참이었다. 밖에서 대문을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권종성인가? 한 잔 더 하자고 술병을 차고 오는 건지 몰랐다. 오후 내내 함께 앉아 식자를 했으니까. 계승이 대문을 열다가 술이 확 깨었다. 문밖에 서 있는 이가 곱사등이 오돌매였다.

"밤중에 웬일로......"

오돌매가 마당으로 서슴없이 들어왔다. 아궁이에 불어 넣고 있었다며 곧 자려고 한다고, 계승이 짜증난 목소리로 말했다. 오돌매가 슬금슬금 아궁이 앞으로 걸어갔다. 계승도 주춤주춤 오돌매를 따라갔다.

"지난밤에 말이오, 아무래도 비밀이 누설된 거 같단 말이야."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때 갔던 달성회 회원들이 잡혀 갔느냐고 다시 물었다. 오돌매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모르지......근데, 마욱진의 집까지 자경단이 지킬 리가 없거든."

"......"

오돌매의 굽은 등이 아궁이의 불빛을 받아 기괴하게 튀어나와 보였다.

"임형이 읍성을 허물었잖소?"

"......"

물이 끼얹어지듯 등이 서늘했다.

"성을 허물려고 했던 최가가 칼 맞은 거 알죠?"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요? 난 지난밤 계획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달성회 회원들이지. 피로 맹세했어."

"난 절대 아니오."

계승은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오돌매가 낮은 소리로 이죽거렸다.

"음, 아니라고? 아니라면 당신이 불을 질러보시요. 마욱진의 집은 아니오. 자경단을 이끄는 이와세 상점에 불을 지르시오."

오돌매의 눈이 파랗게 빛을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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