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위원회 없이 출범한 새 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외교안보 이슈 해결이 꼽히고 있다. 북핵 공조, 사드 배치, 위안부 문제, 한미 FTA 재협상 등 굵직굵직한 난제가 산적해 있다. 이달 초 4년간의 원장직을 끝으로 27년간 몸담아 온 국립외교원을 떠난 윤덕민 전 원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국립외교원-1963년 설립된 예비 외교관의 산실이자 외교부를 비롯한 정부부처 고위직 교육, 외교'안보 정책 가이드라인 제시 등 싱크탱크 역할을 맡고 있는 정부기관.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2주 차에 미국, 중국, 일본에 중량급 특사를 파견했다. 이른바 '코리아 패싱'(Korea passing'한국 건너뛰기)의 불안감을 잠재웠다는 평가가 나오는데 동의하시나.
▶문재인정부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 최악의 대외환경 속에서 출범하였다. 실패 국가라 하지만 북한의 핵무장이 현실화되고 있고 중국이 지역의 패권을 노리고 있으며 일본도 열강으로 부상하고 있다. 우리가 믿어왔던 동맹국인 미국에서도 자국 우선주의라는 새로운 동맹관을 가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등장하였다. 설상가상으로 국내 정치상황으로 인해 지난 반 년 외교 공백이 불가피했다. 문재인정부가 출범에 즈음하여 발 빠르게 특사단을 보내 외교 루트들을 복원하려고 한 노력은 상당히 평가할 만하다.
-지난 21일 발표된 외교안보 인사 중 가장 파격으로 평가되는 것이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이다. 70년 외교부 역사상 첫 번째 여성 장관이자 비(非)외무고시-비(非)북미라인인데 어떻게 보시나.
▶여성 장관 출현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국립외교원에 들어오는 젊은 외교관들을 보면 70% 가까이가 여성이다. 지난해 경우 양성평등에 의한 규칙을 적용 안 하고 성적순으로 뽑았으면 80%가 여성이 될 뻔했다. 이처럼 최근 10년 사이에 남녀 외교관 수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강경화 후보자는 다자외교 무대인 유엔에서 잔뼈가 굵은 분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때부터 10년 가까이 국제무대에서 활약했던 분이기 때문에 상당히 능력이 있고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외교안보의 핵심 현안인 북핵문제라든지 정무적인 능력을 발휘해야 할 4강 외교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 점을 어떻게 보완할 것이냐를 잘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첫 여성 장관이라는 이미지는 좋지만, 청와대 주도가 지나치게 강화되면 보조적 역할에 그칠 수도 있다.
-청와대 안보실장이라는 포스트가 박근혜정부 때 만들어졌는데 책임을 맡았던 김장수, 김관진 두 사람 모두 국방장관 출신이었다. 그런데 신임 정의용 안보실장은 외교관 출신이다 보니 안보의 축이 국방 중심에서 외교 중심으로 넘어가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문재인정부는, 안보실장을 국방장관 출신이 하다 보니 국방 중심으로 흘러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역할과 기능이 축소된 것에 문제의식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NSC는 그야말로 종합적으로 상황을 보면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조정기능이 필요한 곳이다. 국방 분야만 알아서는 안 되고 외교와 통일 분야도 알아야 한다. 제가 보기에는 새 정부가 상당히 고심을 한 것 같다. 국방, 외교, 통일 분야를 아우를 수 있는 분, 예를 들면 문정인 연세대 교수 같은 인사들을 준비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결국은 외교관 출신 정의용 전 대사를 낙점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균형 잡힌 NSC 운영을 목표로 한 것 같다.
-국방부 장관에 비(非)군인 출신 민간 전문가를 임명할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혹시 그렇게 된다면 우리 군의 사기에 문제가 없겠나.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은 군에 대한 문민 통제(civilian control)가 확립된 체제다. 우리도 문민 장관이 나와야 할 시점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꼭 군 출신이 장관이 되면 군의 사기가 올라가고 문민 출신이 되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번에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모르겠는데 혹시 문민 출신 장관이 들어온다면 국방개혁에 방점을 두는 인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홍석현, 문정인 두 중량급 통일외교안보특보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는데, 단순한 자문역에 그치면 몰라도 자칫 지휘체계가 혼란스러워질 수도 있지 않을까.
▶일본의 경우 아베 총리는 NSC와 관저 중심의 외교안보정책을 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중량급 특보의 등용은 청와대 중심으로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집행부서로 하여금 이행하도록 하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문제는 옥상옥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노무현정부에서 주미대사를 지냈던 한승주 전 외교부 장관의 회고록에 나오지만, 2003년 노 전 대통령이 "외교'안보를 세 사람이 하니까 골치가 아파서 못살겠다"고 말했다 한다. '세 사람'은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 라종일 안보보좌관, 반기문 외교보좌관이었다.
-북한은 문재인정부 출범 후 두 번이나 미사일을 발사했다. 엄청난 군사적 도발이다. 국방보다는 외교, 압박과 제재보다 대화와 협상을 강조하는 노선으로 가다 보면 문재인정부 내에서도 외교안보 노선을 둘러싸고 묘한 균열이 발생할 수도 있지 않겠나.
▶노무현정부 때 이른바 '자주파 대 동맹파' 갈등이 있었다. 인선이 완성된 것은 아니어서 최종적 판단은 어렵지만, 자주파적 요소를 가졌던 분들이 아직까지는 인선에서 배제되고 있다. 정의용 실장과 강경화 장관 후보자 모두 정통 외교관 출신이기 때문에 이념적 색채가 강하지 않다. 특보들도 한 분은 학자시고 또 한 분은 언론사 사주였기 때문에 그렇게 편향돼 있지 않다. 아직까지는 노선갈등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6월에 한미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다.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가.
▶제일 중요한 것은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첫 전화통화에서 "대한민국 외교안보정책의 근간은 한미동맹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못 박은 건 매우 시의적절했다. 다음으로는 북핵 문제 해결의 구체적 로드맵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트럼프가 얘기한 '최대의 압박'(maximum pressure)의 국제적인 공조를 어떻게 실현할지 긴밀히 논의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북한이 근본적인 태도변화를 보이면 어떠한 인센티브를 제공할지 이른바 '관여'(engagement) 단계의 청사진을 만들어내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우려스러운 것은 북한이 미국 본토에 도달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포기하겠으니 다른 것은 현 수준에서 묵인해 주고 북미 평화조약을 맺자고 제안할 때 트럼프 대통령이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가 하는 점이다. 완벽한 비핵화 스케줄이 없는 상태에서 현 수준의 동결을 전제로 대화가 이루어지면 상당히 우리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
-사드 배치의 절차적 정당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국회 비준 동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
▶조약이라면 비준 동의가 필요하지만 사드 배치는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미행정협정(SOFA)에 입각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비준동의가 필요 없다. 주한미군은 여러 가지 무기를 가지고 있다. 사드는 방어용이지만 공격형 자산도 있다. 예를 들어 지금 군산에 F16 전투기가 있는데 노후화됐기 때문에 조만간 F35 스텔스기로 바뀔 것이다. 그것은 베이징이든 상하이든 어디든지 날아가서 레이더에 안 걸리게 공격할 수 있는 자산이다. 만약 중국이 뭐라고 하면 또 국회 비준을 받을 것인가? 한미동맹의 근간을 해칠 수 있는 일이다.
-위안부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어떤 합의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당했던 고통을 보상할 수는 없다. 미약하나마 재작년 12월 28일 합의가 이뤄진 후 한 달 가까이는 국민의 50% 이상이 합의를 지지했다. 그게 정부의 소통 노력 부족으로 뒤집어졌다. 일본 정부의 자세도 문제가 있었다. 가해자로서의 진정한 사죄와 반성보다는 돈 나눠준 것으로 끝난 것이라는 투의 말들이 우리 국민의 자긍심과 자존심에 상처를 줬다. 지난번 합의는 수정주의적 역사관을 지닌 아베 신조 총리가 사죄도 하고 책임도 인정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그런데 피해자 할머니들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그 고통을 어루만져주는 역할이 부족했다. 이 합의 자체를 파기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합의 당시 46명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생존해 계셨는데 거의 80%가 치유화해재단의 프로세스를 수용하셨다. 두 분은 해외에 계셨다. 6분 정도가 아직까지 반대하고 계시는데, 만약 이 합의를 파기할 경우 화해 프로세스를 받아들인 할머니와 유족들은 어떻게 되느냐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문희상 특사도 파기는 언급하지 않고 한국 국민 정서상 수용하기 힘들다는 선에서 얘기를 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의 북한 내부 상황을 어떻게 보시나? 핵, 미사일 개발과 숙청을 통해 김정은 정권이 공고화되고 있다는 분석도 있지만, 장마당 등 사(私)경제의 활성화로 당국의 주민통제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는데….
▶김정은 정권은 핵과 미사일을 빵빵 쏘아대며 강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으로는 서서히 와해되고 있다. 말씀하신 대로 사경제 영역이 커지고 있는데 계획경제가 전혀 작동을 안 하기 때문이다. 결국 먹고사는 문제를 방임하거나 묵인하게 돼 사경제가 커졌다.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 전환 사례를 보면, 사경제 영역이 확대되면 확대될수록 당국의 인민에 대한 통제력은 약화되었고 결국 체제붕괴로 이어졌다. 북한이 내구력이 강한 국가라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이러한 길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흔히들 외교관을 화려한 직업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할 고달픈 직업이다. 가족과의 생이별도 감수해야 한다. 30년 가까이 외교현장을 관찰해 오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겉은 화려한데 속은 말씀하신 대로 어려움이 많다. 제일 심각한 문제는 열악한 인프라다. 사람 수가 너무 적다. 제가 1990년대 초반 국립외교원에 들어왔을 때 외교부 인원이 2천 명 조금 넘었다. 27년이 지난 지금 2천200명이다. 그런데 1990년대 초반 우리나라 해외여행 인구가 100만 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2천만 명이다. 우리 해외공관이 140∼150개 되는데 한 해 2만 건 정도의 영사사건이 발생한다. 신속하게 대응하기에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역부족이다. 대사나 총영사에 직원이 고작 서넛인 초미니 공관도 많다.
그런데 수천 km 떨어진 곳에서 영사사건이 터졌다고 가정해 보자. 영사들의 열정페이라고 하는데 애국심 하나로 수천 km를 달려가는 모범적인 사례도 있다. 그런데 구조적으로 매번 가능한 일은 아니다. 문제는 대응이 조금만 삐끗하면 SNS을 타고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더 커지면 영화화가 된다. 그런데 초인적인 대응을 못 한다고 문제 삼아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지금 외교 인력이 2천200명인데 영사업무를 담당할 인력 2천 명은 더 있어야지만 해외의 사건사고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교라는 것이 고위급 접촉 등의 정무적 업무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급 사교 파티 다니는 외교관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요즘 외교관들은 주재국에서 그 나라 시민사회와 잘 어울리면서 자국민을 보호하는 새로운 업무를 요구받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19, 20세기 오스트리아 빈에서의 외교 같은 정무외교 중심으로 시스템이 편성돼 있다. 빨리 그런 것들을 개선해야 한다. 우리나라 인구의 3분의 1 수준인 네덜란드는 외교관 수가 3천500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급작스럽게 공무원 수를 못 늘린다면 3천 명 체제라도 시급히 갖춰야 한다. 그래야만 해외 국민들에 대한 보호업무를 제대로 할 수 있다.
※매일신문'TBC 공동기획 '신지호가 만난 사람'은 5월 27일 오전 9시 30분 TBC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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