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신라의 달밤, 수탉을 잡다!

살다 보면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다. 사람도 나라도.

음력 2월 어느 날 밤 눌지왕이 급명을 내렸다. "집 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모두 죽여라!"고. 그러자 사람들이 그 뜻을 알고 국내에 있는 고구려 군사들을 모두 죽였다. 그 가운데 한 명이 겨우 탈출해 고구려로 돌아가 사건의 전말을 고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고구려 장수왕은 즉시 군사를 출병시켜 신라로 쳐들어왔다. 이때 신라는 고구려군을 잘 막아냈고, 마침내 고구려로부터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서기 웅략천황(雄略天皇) 8년(464년) 2월조에 실려 있다. 당시 고구려는 정병 100명을 파견해 신라를 지켜주고 있었다. 그중 한 군사가 휴가를 가는 길에 신라인을 말잡이로 데리고 갔는데, 도중에 그 종자에게 "너희 나라가 우리나라에 깨질 날이 머지않았다"고 했다. 즉 고구려가 신라를 지켜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신라를 정복할 계획이라는 비밀을 누설한 것이다. 이에 신라인 종자는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신라에 되돌아와 그 이야기를 전했다. 고구려 정병 몰살 사건은 이렇게 해서 일어났다. 고구려로부터의 자립을 위해 눌지왕이 위험을 무릅쓰고 던진 승부수였다.

백제-가야-왜 동맹에 수난을 겪던 신라는 왜와 가야군이 왕도 안까지 쳐들어오자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나물왕은 399년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사신을 보내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이에 이듬해 5만의 고구려군이 내려와 서라벌에 있던 왜와 가야군을 축출했다. 그렇게 신라는 고구려 영향권으로 들어갔다. 고구려는 이런 신라를 속국으로 여겨 왕위계승에까지 간여했다. 눌지왕은 그 자신도 고구려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즉위하자마자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던 동생 복호를 몰래 데려오는 등 자립을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날 밤 그는 국운을 걸고 고구려 정병을 몰살했고, 마침내 고구려와 완전히 결별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한참 뒤 다시 일어났다. 고구려와 백제 양국으로부터 시달리며 고립되었던 신라는 살기 위한 방편으로 당(唐)과 연합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당이 속셈을 드러냈다. 660년 신라군이 당군과의 합류 지점에 늦게 도착하자, 소정방(蘇定方)이 신라 장군의 목을 베겠다고 나섰다. 이를 빌미로 신라군의 통수권을 장악하려 한 것이었는데, 김유신이 그럼 당과 먼저 싸우겠다고 결연한 자세를 보여 소정방의 기를 꺾어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당이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자 사생결단하고 맞서 싸웠다.

요컨대 신라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과감하게 강대국에 도움을 청했지만, 그들이 자국을 위협할 때는 국운을 걸고 싸워 독립을 유지했다. 국운을 건 모험과 과감한 결단, 그것이 신라가 후발 국가로서 최종 승자가 된 원동력이었다.

역사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을 얘기할 때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흔히 거론한다. 현재와 미래가 분명히 보이지 않을 때, 그리고 나라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는 역사에서 답을 찾곤 한다. 그래서 지난해 경상북도에서 발간한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에 나오는 역사의 한 자락을 돌아보았다. 그때보다 더 복잡한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수탉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그 밤, 눌지왕도 무척 두렵고 외로웠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왜 신라인들은 고구려 정병을 수탉으로 표현했을까? 어떤 이는 고구려인들이 새 깃털을 꽂은 조우관을 썼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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