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참한 전투에서 총알받이로 나서야 했던 소년병들을 우리 사회가 잊어선 안 됩니다."
6'25참전소년소녀병전우회(이하 전우회)는 21일 대구 낙동강승전기념관에서 순국소년병 위령제를 열었다. 치열했던 전장에 나섰던 300여 명의 생존 소년병들은 노병이 되어 하얀 모자를 쓰고 꽃다운 나이에 스러져간 전우들의 넋을 기렸다.
6'25전쟁 당시 징집 대상 연령은 만 18세에서 30세. 하지만 대부분의 소년병은 14~17세로 병역의무가 없는 나이로, 학도병과는 달랐다. 보호받고 씩씩하게 자라나야 할 2만6천여 명의 소년병들은 전선에서 3천여 명 가까이 목숨을 잃었다.
나라를 구했다는 소년병들의 자부심 뒤에는 슬픔과 두려움도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전쟁 발발 당시 대구농림중학교(대구농업마이스터고 전신)에 다녔던 장성곤(83'수성구 연호동) 씨는 고작 16세에 펜 대신 총을 들었다. 장 씨는 "정상적으로 징집돼 온 이들은 전쟁에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 만한 나이였다. 그러나 어린 애들이 오히려 말을 잘 듣고 겁이 없다고 해서 힘든 전장에 많이 투입됐다"며 "전투에서 소년병들은 총알받이에 가까울 정도였다. 무기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일부 전우는 작동도 잘 안 되는 소총을 들고 나섰다"고 회고했다.
6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들은 목숨을 잃은 전우들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했다. 장 씨는 낙동강 전투 얘기가 나오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손수건만 적셨다. 그는 "총에 맞아 죽어가던 동료가 내 손을 꼭 잡고 한 마지막 얘기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집에 가서 물에 보리밥을 말아 실컷 먹고 싶다'는 말이었다"며 "총과 포탄 파편에 맞아 다치고 제대로 후퇴하지 못하는 동료의 신음을 수없이 들었다. 전쟁터의 공포는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떠올렸다.
현장에 있던 문화해설사 신혜주 씨 역시 안타까운 사연을 전했다. 신 씨는 "거리에서 강제로 트럭에 태워 부대까지 가서 보니 키가 너무 작아 되돌려 보냈지만 먹을 것도, 차비도 없어 어쩔 수 없이 소년병으로 참전한 사례도 있었고, 대구로 피란 왔다가 끌려간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날 모인 소년병들은 한목소리로 정부의 지원 확대를 촉구했다. 박태승 전우회장은 "소년병들은 100% 미혼으로 후사가 없어 이들을 돌볼 가족이 없는 상태"라며 "헌법재판소에서도 소년병 징집이 불법이었으며 보상이 타당하다고 판결한 만큼 지원이 늘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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