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가 뻔한데 주식 투자할 바보는 없다. 그런데 1998년 이런 상식이 깨지는 일이 일어났다. 이해 단행된 대구은행의 유상증자였다. 외환위기 직후 대구은행은 존폐 기로에 놓여 있었고 주가도 1천~2천원 수준으로 바닥을 기었다. 자본금 확충이 절실했던 대구은행은 1천2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발표했다. 시장에서 헐값에 살 수 있는 주식을 5천원 가격에 청약하는 내용이었으니 성공할 수 없는 시도였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대구경북민들이 너도나도 주머니를 열어 증자에 참여한 것이다. '대구은행 주식갖기' 운동이 펼쳐졌고 청약 금액은 1천억원을 넘겼다. 당시 유상증자에 실패했다면 대구은행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대구은행은 대구경북사람들에게 '향토기업' 이상의 의미를 지닌 기업이다. 그런데 요즘 대구은행을 바라보는 지역민들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대구은행을 둘러싸고 실망스러운 일들이 잇따라 터져 나와서다. 직원들의 성추행 파문으로 은행장이 사과하는 일이 벌어진 데 이어, 이번에는 속칭 '상품권 깡'을 통한 비자금 조성 논란까지 빚어졌다. 경찰이 공식 수사에 나서지 않았기에 사실 여부를 예단할 수는 없다. 경찰로서도 내부 투서만으로 대구은행에 대한 압수수색이나 계좌추적 등 본격 수사에 나서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눈치다.
매머드급 악재 속에서 은행 안팎에서는 온갖 말들이 흘러나오고 조직도 크게 동요하고 있다. 투서와 제보가 사정기관 및 언론으로 지속적으로 새어나오는 것과 관련해 안팎에서는 차기 은행장 자리를 노린 알력설마저 나돌고 있다. 주목할만한 것은 이 같은 루머들이 정권 교체기 친박(親朴) 금융인들에 대한 물갈이가 진행되고 있는 틈을 타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중도 사퇴는 없다며 박인규 은행장은 정면 돌파 의지를 피력해 놓은 상태이지만 그의 머릿속은 아주 복잡할 것만 같다.
1992년 은행장과 전무이사 간의 알력 여파로 시중은행 임원 출신 인사가 은행장으로 영입된 것만 제외하면 대구은행은 내부에서 은행장을 배출해 왔다. 은행장이 임기를 남겨둔 상태에서 용퇴함으로써 관치금융 외부인사가 날아드는 것을 차단해 온 것이다. 합리적 의사 결정에 의해 은행장 자리가 양위(讓位) 돼온 것으로 외부에 알려졌지만 속사정을 들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대구은행에서는 임원이 되거나, 나아가 은행장이 되려면 강력한 '빽'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는 것이다.
은행장 또는 유력 임원에게는 정권 실세 또는 유력 정치인과의 친분설이 자의든 타의든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박 행장이 선임됐을 때도 비슷한 이야기가 없지 않았다. 하기야 퇴직 후 자회사로 떠난 임원이 대구은행장으로 화려하게 컴백한 것은 그가 유일무이해서인 듯하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당시 은행에서는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우스갯소리가 나돌았다.
대구은행이 이처럼 흔들리고 시민 불신을 받는 책임은 당연히 은행장에게 있다. 대구은행의 최고경영자인 박 행장은 조직이 정치인 줄대기와 파벌 만들기, 자기 사람 심기 등으로 병들고 있다는 안팎의 지적을 가벼이 여기지 말아야 한다. 만약 차기 은행장 자리를 노린 알력설이 이번 루머의 진원지라면 좌시해서 안 될 일이다. 오죽했으면 은행장 내부 승진 전통을 깨더라도 외부에서 전문 경영인을 은행장으로 영입해 탕평 인사를 하고 조직을 쇄신해야 한다는 목소리마저 외부에서 나오고 있겠는가.
대구은행은 대구경북민들의 손에 의해 1967년 태어났고 지역민들의 열렬한 지원 속에 성장했다. 지배주주가 없다 뿐이지 대구은행에 주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구은행의 주인은 대구경북사람들이다. 대구은행을 '무주공산'(無主空山)이라고 착각해 사심 챙기는 이가 득세한다면 대구은행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1998년 외환위기 같은 외부적 위협으로부터 대구경북민들은 대구은행을 지켜냈다. 하지만, 만일 내부적 요인으로 대구은행이 위기에 처한다면 구해줄 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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