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54>-엄창석

배가 살살 아팠다. 통로를 빠져나와 객차 문을 열었다. 객차와 객차 사이의 공간에는 사람들이 서 있거나 바닥에 퍼질러 앉아 장죽을 빨고 있었다. 벌어진 쇠판 틈으로 객차를 연결하는 굵은 고리가 으스스하게 보였다. 바람이 솔솔 올라왔다. 계승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 밑으로 자갈과 침목이 훤히 보였다. 변기에 쪼그리고 앉았다. 전날 내내 신경을 쏟은 탓인지 똥이 잘 나오지 않았다. 밖에서 화장실 문을 쿵쿵 두드렸다. 기차가 달릴 때 객차 사이마다 있는 화장실에서 대소변이 레일 위로 뚝뚝 떨어지는 광경을 상상하자 웃음이 나왔다. 기차가 움직여야 항문이 열리지 않을까. 기차가 떠난 자리에 똥이 쌓여 있는 건 아무래도 흉측한 노릇이다. 다시 밖에서 문을 쾅쾅 두드렸다.

가까스로 용변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변소를 쓸려고 기다리는 이들이 많구나 싶었는데 뜻밖에 밤색 제복들이 문 앞에 우글거렸다. 그들이 계승의 팔을 낚아챘다.

"왜 이러시오?"

일본 헌병들이었다. 계승이 팔을 휘둘러 그들을 떨치려 했다. 헌병들은 양쪽에서 팔짱을 끼고 계승을 사납게 끌어내렸다. 엎어지다시피 승강장으로 튕겨나갔다. 뭔 일이냐, 사람을 잘 못 봤다고, 소리 질렀지만 헌병들이 억세게 계승의 팔과 가슴에 포승줄을 묶었다.

부우붕,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승은 끌려가다 기차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구경하고 있었고, 3등 객차에는 장상만이 창가에 앉아 자고 있는 게 보였다.

"네놈이 임계승이지?"

계승을 역사 안에 있는 방에 밀어 넣고는 제복 하나가 다가와 우리 말로 물었다. 헌병 보조원이었다. 일인 헌병들은 보조원을 한둘씩 두고 있는데 그들은 한인이고 통역을 맡고 있었다.

어찌된 영문일까. 경운궁에서 나올 때부터 미행을 시작했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서울 정거장에 도착한 후로 따라붙었는지. 그때는 긴장이 풀어져 조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첩보를 받고 대전역에서 헌병들이 동원되었는지도 모른다.

계승은 임계승이 아니라고 해야 할지, 맞다고 실토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부인한다고 해도 당장 풀어주진 않을 테다. 보조원이 헌병에게서 종이를 받아들고 계승의 얼굴과 번갈아 대조해보며 흐물흐물 웃었다. 얼굴이 그려진 체포 전단인 모양이었다.

"입술이 얇고 턱주가리가 긴 게 똑 같구만."

계승은 거세게 도리질을 했다.

"비슷하게 생긴 사람은 많아요. 왜들 이러시오. 난 그릇 장사하는 상인이오."

출판사 직원이라고 할까 하다가 어물쩍 말을 돌렸다.

"이 새끼 봐라. 너, 경운궁엔 왜 갔어?"

가슴이 우지끈, 내려앉았다. 궁궐에 들어간 것까지 안다 말인가? 계승은 충격을 받았지만 곧 힘이 솟았다. 폐하를 뵙고 왔다는 자신감이 탱탱하게 부풀었다. 통역을 맡은 보조원이 한인은 아닌가. 계승은 눈을 번쩍 떴다. 너는 조선놈이잖아! 내가 황제의 인장이 찍힌 칙유를 가지고 있어,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때 일인 헌병 서넛이 들어오지 않았으면 그렇게 벼락같이 내질렀을지도 몰랐다.

늦게 들어온 헌병들과 보조원이 뭐라 일어로 얘기를 주고받았다. 헌병 하나가 허리에 찬 칼을 뽑았다. 묶인 채로 주저앉아 있는 계승의 머리 위로 뽐내듯이 허공을 베었다. 시퍼런 살기가 스쳤고,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그때 보조원이 발을 들어 그의 가슴을 걷어차며 무슨 말을 내뱉었는데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그 말에 계승의 몸은 돌처럼 굳어버렸다.

"일 급 화적이 걸려들었네. 이 새끼, 경상도 성현터널에서 일본인 세 명을 죽이고 도주했잖아."

계승은 망연하게 맞은 편 벽을 바라보았다. 성현터널에서 일본인 셋을 죽었다고...... 그럴지도 몰랐다. 부산 초량에 가기 전에, 밀양과 언양을 떠돌기 전에 그는 성현터널 공사장에 있었다. 경부선 철도부설 공사 때 그는 청도의 성현터널에 투입되었다. 경부선 공사에서 가장 긴 터널로, 험악한 산악지대를 뚫는 탓에 거기에 사용한 스위치백 공법을 천황에게 보고할 만큼 중요했던 현장이었다. 수백 명이 동원된 그 산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터널 속은 암반 사이로 자주 지하수가 쏟아졌고 무른 토사가 쌓여 좁은 늪을 이루기도 했다. 계승은 삼년 전, 그 일이 아뜩하게 머리를 스쳤다.

그날 밤, 21번째 구간에서 지지대가 무너지고 있다고 그는 보고 하지 않았다. 그 안에 횃불을 켜고 이십여 명의 일꾼들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모두가 일본에서 건너온 노무자들이었다. 그놈들은 하나같이 사악했다. 계승과 다른 넷은 지지대를 보완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용구를 집어던지고 넷은 좁은 터널 속을 뛰었다. 퍼낸 흙을 나르는 운반조들이 곳곳에 지렁이처럼 엉켜 잠들어 있었다. 밤낮을 구별하지 않은 격무에 시달렸던 탓이다. 터널 밖으로 나올 즈음 굉음이 들렸던가. 계승은 자신의 가슴에서 굉음이 들린다고 생각했다. 노역장에서 도주하는 게 꿈이었다. 야밤을 타고 산비탈로 내려오자마자 넷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가 계승의 나이 스물 둘이었다. 홀로 떠돌던 계승은 초량을 거쳐 대구로 돌아오는 데 3년이 걸렸다.

급변하는 세월에 떠밀려 멀리 물러가 있을 줄 알았던 그 사건이 대전 정거장의 한 구석방에서 헌병 보조원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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