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나루
구미시 해평면의 냉산과 일선교 사이의 태조방천에서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크게 싸웠다. 싸움에서 이긴 왕건은 낙동강 나루를 건널 때 승리의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나의 나루(余津) 혹은 고려의 나루(麗津)라는 뜻으로 여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차리진(餘次里津), 여차니진(餘次尼津)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표기되었다.
1618년에 간행된 최현의 일선지에는 이를 월파진(月波津)이라 하였는데, 동서 통행자 모두가 이를 이용하였다고 했다. 육상 교통망과 수상 교통망을 연결하는 주요 나루였던 여차니진은 영남의 최대 육상 물류망인 영남대로와 바로 연결되었다. 이 때문에 물류 중심지역으로서의 중요성이 높았다. 지금의 해평면 낙산 3리 원촌마을 양수장 부근이다.
◆봄꽃처럼 떨어진 청춘의 꽃잎
밤하늘에 별빛이 흐르고, 병사들의 마음에도 별이 흘렀다. 강가에 꽁꽁 묶인 나룻배 한 척이 전선의 고요를 깨며 온밤을 삐거덕거렸다. 그것은 묶여 있어 서러운 병사들의 마음을 대신한 울음이었다.
무심한 강물은 말없이 흘렀고, 언제부터인지 사람의 마음에도 강이 생겼다. 가로막힌 강을 사이에 두고 날을 세운 단절의 시간은 참으로 길었다. 그리하여 나루는 그리움을 잊어버린 사람들을 불러 세우고 싶었다. 누가 저 꽁꽁 묶인 조각배를 강물에 띄워 마음과 마음을 이어 줄 것인가. 강은 물안개만 피워 올릴 뿐 대답이 없다. 별빛은 사그라지고 병사들의 희망도 별과 함께 사라졌다. 별은 정녕 절망의 끝에 선 사람들이 저마다 하나씩 매달아 놓은 희망이었을까?
밤새도록 마음을 졸이고 있던 왕건은 북쪽 하늘에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적의 병참기지를 목표로 잠입한 군사들이 그 임무를 무사히 수행한 것이리라. 그것을 본 견훤의 진지에서 소요가 일었다. 그 틈을 이용하여 왕건은 북소리를 크게 울리며 전진 명령을 내렸다. 병참기지 방어를 위해 견훤의 병사 일부가 돌아갔지만, 적의 대항이 만만치 않았다. 적이 하나 죽으면 아군도 하나가 죽어야 하는 싸움은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아직도 견훤을 대적하기에는 내 힘이 미약한 것인가.'
견훤의 꺾이지 않는 기세 앞에 왕건의 마음이 약해졌다. 그러는 사이 하늘은 연기로 가득 차고 적들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고려군의 화살이 그들의 등으로 거침없이 날아갔다. 봄꽃처럼 떨어진 청춘의 꽃잎이 온 들판에 흩어졌다. 왕건은 후퇴하는 견훤의 뒤통수에 대고 큰소리로 외쳤다.
"후백제의 왕이시여, 이제 우리 그만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평생을 싸우며 보내기에는 얼마 남지 않은 세월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물이 깊어 못 오시겠다면 제가 나룻배 한 척을 띄워 드리리다."
왕건은 답답한 마음에 적이 듣든 말든 넋두리를 했다. 그들이 물러간 강가에 서서 아직은 때가 아님을 느낀 왕건은 훗날을 기약했다.
승리의 깃발을 높이 세워 낙산리 진지로 돌아가는 고려군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강의 서쪽에서 올려다보이는 냉산은 나지막한 산들을 겹겹이 거느리며 우뚝 솟아 있었다. 그 한쪽 줄기를 잡고 낙동강을 향해 뻗어 내린 구릉에는 낙타 등처럼 볼록 솟은 거대한 무덤군(낙산리 고분군)이 봄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저들은 어떤 삶을 살았기에 무덤조차 저리도 당당한 것일까.
나루가 가까워지니 물오른 수양버들이 강물 위에 내려앉아 찰랑거리고 있었다. 봄꽃은 향기로 그 존재를 먼저 알려왔다. 꽃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 나루에는 누군가 조팝꽃을 한 아름 꺾어 항아리에 꽂아 놓았다. 그것을 바라보던 왕건의 가슴에 봄바람 한줄기가 스쳐 지나갔다.
◆꽃향기에 묻은 그리움
궁예의 휘하에 있던 26세의 왕건이 903년의 어느 날, 수군을 이끌고 적진의 끝자락인 나주 정벌에 나섰다. 견훤에게 반감을 품은 나주의 호족 오다련의 도움으로 왕건은 금성 공격을 승리로 이끌었다.
나주 주변의 10여 개 군현도 왕건의 기세에 눌려 항복했다. 이 지역에 구축한 왕건의 군사 거점은 견훤에게는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이를 기회로 왕건은 그의 이름을 크게 떨쳤으며 궁예로부터 더욱 신뢰를 얻었다.
호족의 집에서는 왕건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연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초청을 받아 군사들과 함께 대문을 들어서던 왕건은 항아리를 이고 사랑채를 향하던 낭자와 부딪치고 말았다. 항아리가 깨어지면서 낭자는 곡주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채 어쩔 줄 몰라했다. 꽁꽁 여며놓은 그녀의 산봉우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청년 왕건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낭자 어디 다친 데는 없소? 미안하구려."
"아니옵니다. 소녀의 잘못이옵니다."
고개 숙인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손님을 모셔놓고 이 무슨 경박한 짓이냐? 조심하라 그렇게 일렀거늘."
때맞추어 그 모습을 목격한 오다련이 그녀의 행동을 꾸짖었다.
"너무 꾸짖지 마십시오. 낭자는 죄가 없소. 다 소장 때문이오."
왕건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편을 들고 있었다.
승리에 취하고 한잔 술에 취한 왕건은 오다련이 마련해준 처소에 들었다. 몸은 나른하건만, 잠이 쉬이 오지 않았다. 낮에 본 낭자의 모습이 눈앞에서 자꾸만 아른거렸다. 그때 문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자리끼를 가져왔는데 잠시 들어가도 되겠사옵니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인은 낮에 본 그녀였다.
"당숙부님 심부름이옵니다. 장군께서 술을 많이 드시어 갈증이 날 것이라 하셨사옵니다. 그럼 소녀는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당숙이라면 이 집의 주인을 말하는 것이오?"
일어서려는 낭자에게 왕건은 말을 걸었다.
"네 그러하옵니다. 몇 년 전 부모님을 여의고 이곳 당숙님 댁에서 살고 있사옵니다. 그럼 이제 나가도 되겠사옵니까?"
자꾸만 가려는 그녀가 야속하여 한마디를 툭 던졌다.
"낭자는 내가 무섭소?"
그녀는 왕건을 바라보며 생긋 웃음 지었다.
"취하셨사옵니다. 그만 주무시는 게 좋을 듯하옵니다."
"내가 취했다고요? 똑바로 걸어 볼 테니 잘 보시오."
왕건은 벌떡 일어나서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일부러 많이 취한 척하고 있다는 걸 눈치 못 챈 그녀는 웃음을 참느라 두 뺨에 홍조가 일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이 궁금하던 왕건은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진이라 하옵니다."
긴장이 풀린 그녀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는 왕건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낭자는 묻는 말에 일일이 대답을 했다.
"부모님은 어쩌다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낭자의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그리도 서러운 것일까. 꽃잎 끝에 맺힌 빗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여인의 눈물 앞에 사나이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그녀를 말없이 안아 주었다. 품속으로 쏙 들어온 그녀의 작은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왕건은 이 가여운 여인을 위해서라면 이름 없는 필부로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인을 안은 사내의 팔에 더욱 힘이 주어졌다.
◆봄날은 가고 향기가 사라지면 나는 어디에서 그대를 만날까
왕건은 꿈 같은 밤을 보내고 아쉬운 마음을 안고 진지로 향했다. 얼마를 갔을까. 진한 향기에 끌려 발길을 멈추었다. 길섶에 하얗게 핀 조팝꽃이 주범이었다. 수수하기만 한 꽃잎 속 어디에 그렇듯 달콤한 향내를 감추고 있었을까. 왕건은 조팝꽃이 진이와 똑 닮았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그녀가 또 보고 싶어졌다. 조팝으로 꽃다발을 만들어 오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오다련의 집안을 기웃거리던 왕건의 눈에 그녀가 들어왔다. 우물가에 쪼그리고 앉은 진이에게 다가가 꽃을 내밀었다. 그녀의 초승달 같은 눈웃음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호족 오다련은 견훤군이 자신에게 보복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에게는 아무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만큼의 막강한 배경이 필요했다. 범상치 않은 왕건의 관상을 대하니 그가 사윗감으로 탐이 나기 시작했다. 지난날 아무 생각 없이 종질녀인 진이를 왕건의 침소에 들인 것이 후회가 되었다.
오다련의 심중을 전해 들은 왕건은 처음 먹은 마음과 달리 진이와 오다련의 딸을 두고 갈등하기에 이르렀다. 나주는 군사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알고 있던 왕건이었다. 그의 딸과 혼인을 맺음으로써 나주 지역을 확실히 잡을 수 있음이었다. 왕건이 이상과 현실 앞에서 갈등하고 있을 때, 눈치 빠른 진이는 소리 소문도 없이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세월은 흐르고, 점점 치열해져 가는 전장의 메마른 땅에서는 그리움의 감정마저도 점점 시들게 했다.
수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향기로 찾아온 그녀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그녀에게 꽃다발을 건네던 떨림의 기억이 쉰을 넘긴 왕건의 무딘 감성을 깨웠다. 자신을 온통 빨아들일 것만 같던 그녀의 뜨거운 눈길이 그리웠다. 순간, 지난날 강락사에서 잠깐 스쳤던 여인의 눈길이 생각났다.
'어쩌면 그 여인이 진이일지도 몰라.'
막연한 기대감으로 왕건은 강을 따라 바쁜 걸음으로 강락사로 향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으며 혼례는 올렸는지 그녀에 대한 궁금증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한 차례의 전쟁을 치른 세상은 고요했다. 강락사에는 부처님의 자비가 세상에 임하길 기도하던 신도들도 몸을 숨겨버리고 강바람만 제집인 듯 넘나들었다. 공양간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수선당(修禪堂)을 돌아 나오니 주지인 듯한 스님이 왕건을 보며 합장을 했다. 마음이 급해진 왕건은 공양간의 아낙에 대해 물었다.
"20년이 훨씬 넘었지요. 다섯 살 된 사내아이와 함께 떠돌아다니는 걸 소승이 거두었지요. 이름도 성도 어디서 왔는지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럼 지금 그 아낙은 어디 있다는 거요?"
"병색이 짙어져 아들과 함께 용한 의원을 찾아 오늘 아침 떠났사옵니다."
스님의 안타까운 한마디에 왕건의 가슴이 녹아내렸다. 돌아오는 나룻배에 앉은 왕건은 잡히지 않는 그리움을 허공으로 쏟아냈다.
'그대 모습 보이지 않아도 나는 조팝꽃 향기에서 당신을 보고 있소. 봄날은 가고 향기가 사라지면 나는 어디에서 그대를 만날까. 그대가 그리운 날을 위해 나는 당신의 이름을 이 나루에 새겨 두리다. 나의 여인 나의 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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