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시인의 사랑

詩가 외면 받는 시대, 순진한 시인, 브로맨스에 '푹'

마흔 살에 경제력'정자 수도 부족

우연히 도넛가게 일하는 청년에 관심

아내보다 더 빠져들어 혼란스러워

고요한 제주 일상적 풍경 볼거리

제주도에서 촬영한 단편영화 '보청기'(2013)로 주목받았던 김양희 감독이 다시 한 번 제주도를 배경으로 장편 데뷔작을 들고 왔다. 이 영화는 지난 4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어 호평을 받았고, 캐나다에서 열리고 있는 토론토국제영화제에 초청돼 상영되었다.

시가 주목받지 못하는 시대에 시인으로 살아가는 한 중년남자 주변에서 펼쳐지는 로맨스의 기쁨과 좌절,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담아내는 시 구절들의 여운이 길게 가는, 개성 있고 훌륭한 데뷔작이다. 저예산 영화의 매력을 한껏 살려낸 작품으로, 가난한 삶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지만 마음만큼은 사랑으로 가득한 못난이 곰돌이 시인이 몹시 사랑스럽다.

제주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살아가는 마흔 살 시인 현택기(양익준)는 초등학교 글쓰기 수업이나 가끔 들어오는 원고 청탁으로 한 달에 30만원을 채 못 벌지만, 시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크디 큰 순수한 남자다. 임신을 간절히 원하는 아내 강순(전혜진)은 경제력도, 정자 수도 뛰어나지 않은 남편을 진심으로 아낀다. 하지만 창작의 한계에 부딪힌 택기는 우연히 도넛가게에서 일하는 세윤(정가람)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끼고, 아내보다 그에게 더 빠져들며 혼란스러워한다.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이 훌륭하여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게 한다.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흥미롭다. 가난한 시인과 생활을 책임진 아내, 그리고 그 둘 사이에 끼어든 생활고에 지친 청년. 택기와 강순 부부의 생활상은 유머러스하다. 센 여자 강순이 더 사랑하는 것 같고, 수동적인 택기는 강순이 하자는 대로 끌려간다. 강순의 거침없는 과격한 애정 공세를 바라보는 것도 은근한 재미다. 택기는 시인들의 합평회에서도 깨지기 일쑤지만, 그가 낭독하는 시는 강렬하진 않아도 묘하게 가슴을 울린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운 아버지를 돌봐야 하는 세윤의 생활은 버겁기 그지없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알 만큼 알아버린 세윤을 보고, 택기는 연민인지 애정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며, 그의 처지에서 최선을 다해 세윤을 돕는다. 세윤은 분노조절장애가 있다고 의심할 정도로 괴팍해서, 버럭 화를 내다가도 금세 수그러들며 이내 친절하고 성실한 청년으로 돌아온다.

개성 만점의 세 사람이 엮어나가는 로맨스는 어쩌면 막장 드라마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에서 나도 어쩔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으며 막장을 써내려가곤 하는 현실에서, 세 사람의 일상과 관계를 지켜보는 것은 위태롭지만 기쁨을 준다. 이 정도로 감정의 결을 잡아내며 그 안에서 유머가 살아나고 슬픔이 폭발하는 영화를 만든 신인감독이라니, 그녀의 앞날이 꽤 기대된다.

독립영화 역사에 기록될 정도의 수작 '똥파리'(2008)의 연출과 주연을 맡아 거칠기 그지없는 용역 깡패로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내었던 양익준, '사도'(2014)로 많은 연기상을 수상했던 전혜진, '4등'(2014)에서 도발적인 연기를 선보였던 신예 정가람의 캐릭터 해석과 소화력이 감독의 연출력과 만나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순진한 시인과 생활인 주부, 폭풍 같은 청년, 세 명이 얽히고설킨 가운데 서로 미워하거나 해치지 않고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관계가 될지 지켜보는 마음도 조마조마하다. 고요한 제주의 일상적 풍경을 구경하는 맛 또한 큰 영화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는 좋은 요소이다.

'언제부턴가 아무 때나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라는 시구는 나이듦과 함께 인내해야 하고 무덤덤해져야 하는 현실이기에 더욱 가슴 깊이 다가온다. 대신 아파해주고 대신 눈물 흘려줄 존재, 시인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영화가 끝난 후 택기가 읊었던 시 구절들을 하나하나 마음에 되새기게 되며, 언제 보았을지 기억에도 없는 책장 위의 낡은 시집을 펼쳐보게 한다. 담담하고, 달콤하고, 아프고, 쓰라리고, 애처롭고, 행복한 온갖 감정들이 요란스럽지 않고 고요하게 뒤섞인다. 감정의 다양한 결들을 느끼게 해주는 대단한 에너지를 갖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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