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1795년 의기양양하게 어머니를 모시고 화성으로 행차한다. 이때 혜경궁 홍씨가 받은 밥상은 그야말로 산해진미. 윤 2월 9일 노량참에서 받은 아침 수라상 차림은 이렇다. 팥물밥, 어장탕, 숭어찜, 골탕, 소고기와 돼지갈비, 우족과 숭어와 꿩, 민어, 편포, 염포, 송어, 전복, 석화, 조개, 박고지, 미나리, 도라지, 무순, 죽순, 움파, 오이 등의 갖가지 식재료들이 구이나 찜, 전 등의 여러 요리 방식으로 상에 올려졌다. 당시 조선에서 나는 맛있는 식재료의 총합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2017년 한 남자가 입맛이 없어 동네 슈퍼에서 냉면 한 봉지를 사왔다. 끓여 먹기 전 봉지에 표기된 재료를 살펴보았다. 감자, 밀, 메밀, 설탕, 고추, 양파, 참기름, 사과, 소금, 파, 마늘, 굴, 생강, 매실, 오이, 북어, 청경채, 콩, 닭고기, 쇠고기….
혜경궁 홍씨가 받은 상의 재료보다야 못하지만, 왕족도 아닌 이 남자의 입맛을 돋우기엔 손색이 없는 식재료들이다. 아리송한 식재료들도 있다. 동결건조생생고추분말. 고춧가루를 얼려서 건조했다는 말일 텐데 '생생'은 왜 들어갔나? 숙성양념베이스, 육수맛조미베이스, 치킨본육추출물? 숙성한 양념과 육수 맛을 내는 무엇을 넣고, 닭고기에서도 무엇을 추출해서 넣었다는 것일 텐데, 표현이 수상하기는 하다.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도 들어가 있다. 폴리글리시톨시럽, 호박산나트륨, 5'-리보뉴클레오티드이나트륨? 이게 도대체 무엇이지?
이 남자의 한 끼 점심 성찬에 참가할 식재료들은 조선 팔도에서만 온 것이 아니다. 미국, 독일, 중국, 네덜란드 등 세계 각국에서 왔다. 이 게으른 평민 남자의 한 끼 점심을 위하여 전 세계의 얼마나 많은 농부와 화학자가 수고했을까? 수송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트럭 기사와 선원들도 동원되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사도세자 아내로 비운의 세월을 겪은 뒤 그래도 살아남아 환갑을 맞이하고, 강성한 아들의 효도를 마음껏 받는 혜경궁 홍씨나 이 남자나, 적어도 식재료 종류나 이름에서만큼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봉지에 적힌 레시피대로 끓여서 후루룩 먹으면서 이 남자는 생각한다. 육식을 좋아했던 세종대왕이 지금 살아 있다면 정말 좋아하실 텐데. 스페인의 하몽하몽, 일본의 화소, 호주나 아르헨티나의 송아지 고기, 중국의 양꼬치, 미국의 스테이크나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한글을 만들어 주신 은혜를 갚는 차원에서라면 당장 치킨집에 전화할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남자는 봉지의 내용물을 다 먹었다. 새콤달콤하긴 하지만 입이 개운하지 않다. 개운한 뭐가 없을까? 굴비 쭉쭉 찢어 찬물에 밥 말아 먹으면? 굴비가 없다. 우물에서 길어온 찬물에 식은 밥 한 덩이를 말아 갓 딴 풋고추를 막된장에 찍어 먹으면? 물론 우물도 풋고추도 막된장도 없다.
조선시대 '홍길동'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은 귀양을 가서 '도문대작'(屠門大嚼)이란 제법 귀한 글을 지었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여러 벼슬을 하면서 먹어 보았던 맛있는 음식과 조리법의 일부를 적어 놓은 것이다. '도문대작'이란 '푸줏간 문 앞에서 고기를 상상으로 씹어본다'는 뜻인데, 귀양살이 처지여서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니, 먹었던 음식이나 추억하고자 지은 글이다. 산해진미가 넘치는 세상에서 대부분의 현대인들도 허균처럼 먹을 것을 추억하고 산다. 어릴 때 어머니가 참기름, 간장 넣고 날달걀 깨서 비벼주었던 그 밥맛이란!
달걀 하나 마음 놓고 못 먹는 세상에서 한 평민 남자는 냉면 봉지에 찍힌 잔글씨를 보면서 허균처럼 입맛을 다신다. 21세기판 '도문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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