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자동차, 한길만 달려왔다<5>…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특선-이헌원

제6부 해외프로젝트총괄 필리핀 담당

1. 필리핀으로 첫 출장

오로지 자동차 판매에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던 중 1993년 6월 1일 나는 뜻 밖에 해외사업본부로 전보발령을 받았다. 판매를 한지 1년 반이 된 시점이었다.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님이 세계경영을 부르짖고 세계 도처에 자동차 생산 공장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1980년대에는 독일, 미국이나 일본에 다니면서 기술을 배워왔지만 1990년대에는 기술을 전수해 주는 시대가 왔다. 회장님께서는 폴란드,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중국, 이란, 이집트, 인도, 베트남, 필리핀 등 세계 각지에 자동차 공장을 짓는 일을 동시 다발적으로 벌렸다.

이 중에 폴란드 공장이 제일 컸는데 여기에는 양영길 부장이 가게 되었고 내가 맡은 곳은 필리핀 이었다. 아득한 옛날 생산기술 업무를 해왔던 옛 동료들을 다시 만났다. 대부분 5Job짜리 초기 단계의 공장이었다. 부평 60 Job짜리 공장을 세운 젊은 엔지니어들은 5Job 짜리 공장을 어떻게 지어야 할 지 모른다. 신진 자동차 시절 초기 공장을 지어본 옛날 엔지니어들이 각광을 받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래서 나도 부름을 받았다. 왕영남 해외 프로젝트 총괄 담당은 어느덧 부사장으로 승진하여 계셨다.

비로소 나는 1987년 이후 6년 동안 정비, 중앙추진실, 판매 등으로 전전하던 서러움을 청산하고 명예 회복을 하게 되었다.

1993년 6월 6일 필리핀 합작 투자 조사단의 일원으로 대망의 필리핀 출장 길에 올랐다. 팀장은 이성수 부장이고, 나, 그리고 ㈜ 대우 과장 한 사람 도합 세 사람이 마닐라 행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비행기를 다시 타보는 것은 무려 8년만의 일이니 실로 감개무량하였다.

일행은 마닐라 시내 마카티 거리에 있는 ㈜대우 마닐라 지사 사무실로 가서 이영남 지사장님께 인사를 드렸다. 이지사장님은 나에게 대우 자동사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였는지 물었다. 나는 내가 해온 일을 간단하게 말씀 드렸다. 나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내가 버스와 승용차조립 생산기술, 정비와 판매일을 한 것을 두고 대단히 좋은 실무경력을 가졌다고 칭찬을 하였으며 특히 버스 생산 기술경력도 있음을 높이 평가하였다. 왜냐하면 여기 마닐라에서 버스 공장도 세울 계획이라고 검토 중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칭찬을 듣는다는 것은 정말 뜻밖이었다. 여기 필리핀에 나와서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생산기술 한가지만으로는 부족하고 정비와 판매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기가 정비와 판매를 할 줄 아는 엔지니어를 요청해서 기다렸다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고생스럽게 해온 일들이 이렇게 전화위복이 될 줄이야, 뒤에 알고 보니 ㈜대우 마닐라 지사장은 이 자동차 사업을 총괄하는 총 책임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첫 대면에서 좋은 인상을 이지사장님께 보였으니 참으로 기분이 좋다. 예감도 좋다. 나이가 내가 제일 많았으나 지사장님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다.

곧 마닐라 지사 김과장이 나서서 합작회사 파트너가 될 필리핀 회사에 대한 브리핑이 있었다. 그리고 합작회사 파트너 사무실을 방문해서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준비한 자기 회사 소개를 하는 인쇄물을 나누어 주고 설명을 해주었다. 제일 먼저 필리핀 투자청(Board of Investment; BOI)으로 인가 받은 자동차 생산 라이선스에 대한 설명이 있었고 자기들만이 향후 자동차 공장을 지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유일한 회사임을 과시하였다. 다음은 그들이 생산하고 있는 일제 야마하 오토바이 공장 현황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이 공장이 세부에 있고 앞으로 대우와 짓게 될 자동차 공장을 이곳 세부에서 첫 건설하고 싶다고 이야기 하였다.

2. 환영 파티

첫 대면은 이렇게 끝났고 그들은 저녁식사 자리로 안내하였다. 한 해산물(Sea-Food) 전문식당인데 아주 큰 레스토랑이었다. 갖가지 살아있는 물고기들이 수족관에 헤엄치고 있는데 손님이 먹고 싶은 것을 고른다.

지사장이 앞에 서서 각자 먹고 싶은 해산물을 선택하라고 하셨다. 종업원이 바구니를 들고 뒤따르며 주문하는 물고기, 게, 새우, 가재, 조개류 등을 담는다. 장을 다 보아서 자리에 앉으니 또 한 사람 종업원이 와서 어떻게 요리를 해서 먹겠느냐고 묻는다. 지사장님은 어떤 요리가 맛있는지 훤히 알고 계신 듯 주저 없이 주문하셨다. 처음 먹어보는 필리핀 음식이다. 그것도 진귀한 해산물 요리이다. 스팀으로 소스를 발라 찐 것, 숯불에 구운 것, 양념을 발라 조린 것. 각종 어패류를 넣고 끓인 조개탕 같은 것, 새우 찜, 생선 국 등 참으로 다양하고 먹음직스럽다. 이윽고 음식이 다 나오자 파트너 사장은 가슴에 십자가를 긋고 기도를 올렸다. 기도를 마칠 때 또 가슴에 십자가를 그었다. 카톨릭 국가이니 식사 중 감사기도가 참으로 장중하고 엄숙하다. 아무것이나 잘 먹는 나이지만 음식들이 참으로 맛있고 독특하다. 제일 인상이 깊은 것은 조개탕이었는데 길다란 푸른 고추가 몇 개 들어있고 새우도 들었고 이름 모를 채소를 넣고 조개를 넣고 해서 끓여낸 것이었다. 국물 맛이 조금 시큼한데 풋고추의 얕은 매운 맛은 진짜 일품이었다. 하도 기가 막히게 좋아서 이 음식의 이름을 물어 보았더니 '시니강수웊'이라고 하였다. 식사가 끝나자 다음은 가라오케(노래방)로 가서 유쾌한 놀이를 가졌다. 단번에 파트너 사람들과 친해졌다.

유쾌한 식사 중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데 난 이들 필리핀 식 영어 발음에 익지 않아서 귀를 세우고 열심히 들었다. 470 프로젝트 때는 영어를 제법 하였는데 그새 쓸 일이 없었으니 좀 드듬거렸다. 앞으로 가족들을 다 데리고 와서 현지에서 살아야 하는데다 이 사람들하고 일해 가는 데는 영어가 필수적이다.

3. Cebu

다음날 일행은 세부란 곳으로 향하였다. 지사장님도 동승하였다. ㈜대우 마닐라 지사에서 근무하는 김과장은 세부란 어떤 곳인지 개략적인 설명이 있었는데 마닐라에서 약 1000Km정도 떨어져 있고, 필리핀 국토의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섬으로 마닐라 이전의 필리핀 수도이었다고 한다. 인구는 약 300만 명이고 면적은 우리나라 경상도 정도의 크기이며 세계적인 관광 휴양 도시라고 한다. 탑승한 비행기 항공사는 Philippines Air이고 비행기 뒤 수직 날개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아침에 떠오르는 강렬한 햇살을 연상하게 한다. 스튜어디스들은 모두 보기 드문 미인들인데, 손님접대가 아주 깔끔하다. 약 한 시간 정도 비행한 후 비행기가 막탄 국제공항에 도착한다는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온다.

도착하니 파트너인 트라스팜(Transfarm) 측에서 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공항을 빠져나오니 넓은 시내 길을 만났는데 길 좌우에 있는 집들의 지붕이 띠로 덮여있어서 아주 소박해 보인다. 세부 시내와 연결한 다리 하나를 지나 조금 더 가니 야마하(Yamaha)라고 쓴 입간판이 보인다. 차는 그곳으로 들어선다. 응접실에서는 노 신사 한 분이 우리 일행을 맞이하여 주었는데 이 분은 사장의 아버지 되는 분이라 하였다. 역시 키도 크고 미남이고 인상이 후덕해 보인다. 이지사장님과는 이미 구면인 듯 다정하게 인사를 나눈다.

곧 노란색의 주스가 유리컵 가득 차서 나온다. 망고주스라고 하였다. 마닐라에서 망고란 과일을 후식으로 맛을 보았는데 바로 그 맛이다. 한 사람이 나와서 오토바이 공장 현황을 설명한 뒤 곧 현장으로 안내해서 공장 곳곳을 보여주었다. 이 회사는 오토바이 공장을 모태로 성장하여 왔고 자동차 조립 라이선스도 취득한 모양이다. 오토바이는 이곳에선 중요한 교통수단이라고 하였다. 시내에서 질주하는 오토바이의 무리를 도중에 많이 보았다.

현장을 한 바퀴 돌고 사무실로 돌아 와서 우리 팀이 조사할 사항들을 기록한 자료를 주고 이부장이 설명하였다. 그의 영어는 유창하였다. 영국에서 오래 근무하였다고 하며 대우자동차의 판매관리부장으로 있다가 해외 사업을 위해 전보 발령을 받은 사람이었다.

설명을 끝내고 이부장은 앞으로 함께 일할 사람들에게 자료조사에 적극 협조 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모두들 키가 작고 얼굴이 까무잡잡하며 무척 순진해 보인다. 필리핀은 스페인의 지배를 360년이나 받았다고 하니 거의 스페인의 피를 받은 혼혈족이라 할 수 있겠다.

산 중턱에 우뚝 선 세부 프라자(Cebu Plaza)란 큰 호텔에 체크인 하였다. 과장 두 사람이, 나와 이부장이 각기 같은 방에 들었고 지사장님이 독실에 들었다.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샤워를 하고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있으니 로비로 내려오라는 연락이 왔다.

어제 만난 사장 LBQ(Luis B Quisumbing)가 언제 왔는지 또 만났고 새로운 인물 한 사람을 소개받았는데 이름이 발보나(Balvona)라고 하는데 첫 인상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 사람은 오랫동안 사장일가를 보필해 온 소위 공신이라고 하였다.

곧 저녁식사를 위해 호텔을 나섰는데 모두들 걸어서 간다. 호텔 가까이 자리 잡고 있는 한 식당이다. 오늘 저녁은 필리핀 전통요리이다. 지사장님이 식사를 주문하였다. 필리핀의 정통음식이라 하니 기대가 되었다. 식당 창가에서 바라보이는 세부의 밤 야경은 과연 아름다웠다. 멀리 막탄 공황의 활주로가 보이고 비행기 이착륙이 가끔 보인다. 낮에 지나온 막탄 다리는 휘황찬란한 조명을 비추면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막탄은 섬이다. 다리가 있는 바다 사이는 큰 배들이 정박해 있는 풍경도 보인다. 밤 경치에 취해 있을 때 음식들이 한 접시씩 날라져 온다. 제일먼저 들어 온 것이 소족발이 담겨있는 곰국이다. LBQ는 웃으면서 이 곰국을 먹으면 밤에 혼자 자지 못한다고 농담을 한다. 이것을 포채로 또는 블라오라고 불렀다. 참으로 먹음직스럽게 두 항아리가 탁자 한 가운데 놓여졌다. 바나나 잎사귀를 4각형으로 잘라서 사람들 앞에 하나씩 놓아준다. 밥통을 맨 아가씨가 오더니 그 바나나 잎사귀 위에 밥을 떠 놓았다. 그리고 한 웨이터가 칼로 포채로의 고기를 썰어서 작은 그릇에 담아 사람들 앞에 각자 하나씩 놓아준다. 통 돼지 바비큐인 레천이 두 접시, 돼지 족발을 튀긴 것 두 접시, 새우 찜이 네 접시, 조개요리 소쿠리가 네 개, 깡꽁이라는 야채가 몇 접시 등이 푸짐하게 차려진다. 이윽고 마실 것들이 나오니 LBQ는 마닐라에서 했던 것처럼 식사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나는 먼저 포채로의 국물 맛을 보았는데 정말 일품이다. 이렇게 맛있는 족발 곰탕은 처음이다. 발라낸 고기와 함께 먹으니 입안에서 거저 확 녹는 것 같다. 기름기가 쏙 빠진 레천(통돼지바베큐)을 깡꽁이라는 야채볶음과 함께 먹으니 이 맛 또한 천하의 일품이다. 기름이 쪼르르 흐르는 흰 쌀밥을 입에 넣으니 거저 고소한 맛이 절로 난다.

나는 필리핀 요리의 먹음직스러운 시각에 어우러진 맛과 향기에 흠뻑 젖었다. 필리핀이 이런 음식문화를 갖고 있다는 것에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본 지사장님은

"좋은 일꾼은 음식을 먹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고 또 한 번 나를 칭찬한다.

4. 콤포스텔라(Compostela)

다음 날 공장을 지을 최적의 장소를 찾아 나섰다. 막탄 공항을 이웃한 곳에 수출산업공단이 있다는 말에 제일 먼저 그 곳을 찾았다. 세부에 있는 유일한 산업공단 이었는데 여기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 나는 벌써 결론을 내렸다. 왜냐하면 공항과 항구가 지척에 있고 전기와 수도시설과 내부 접근하는 도로가 이미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만 임대료가 얼마나 되느냐가 문제였다. 조사를 해보면 알 일이다.

그 다음 트란스팜(Transfarm)측이 추천하는 곳을 방문하였는데 세부 시내에서 차를 탈 때 거리측정기(Mileage Gage)를 꺾어놓고 출발하였고, 시간도 체크 해 두었다가 보니 거리는 26km이고 소요시간은 1시간 10분 이 되었다. 지명은 '콤포스텔라' 라는 곳인데 세부 북쪽으로 해안선에 따라 나 있는 왕복 2차선의 좁은 길을 가다 보니 곳곳이 교통체증이 심했다.

공장 지을 부지 일대를 둘러보았는데 그냥 농촌 논밭이다. 해안도로에서 진입하는 도로가 아주 좁다. 게다가 전기와 수도가 없으니 쇼설 인프라(Social infra)가 전혀 없는 곳임으로 불가 판정을 내렸다. 다음날 우리는 주정부청사 내에 있는 BOI 사무실로 찾아가서 공무원들을 만났다. 막탄 수출 공란 내에 남아있는 부지와 임대로 및 수출공단에 입주 시 받게 되는 인센티브(Incentive)등을 알아보았다.

남아 있는 부지는 향후 10 Job짜리 내지 20 Job 짜리 공장으로 확장할 프로비젼(Provision)을 갖출 수 있는 곳으로 충분하였으며 임대료는 우리가 예상한 것 보다는 낮았다. 임대 최장 기간은 50년이며 이후 공장 건물은 주정부에 귀속된다는 조건이 있었다.

다음은 노동력과 임금수준 물가수준을 조사하였는데 먼저 노동력 확보 문제는 전혀 없었다. 대졸자라도 마음대로 채용 할 수 있겠고 임금 수준은 월 5,000페소(한화 환산 125,000원)이면 충분하고 물가수준은 우리나라의 반 정도이었다.

다음은 항만 시설을 보려 항구를 찾았다. 제1부두가 화물 전용이었는데 대형 크레인이 한대 설치되어 있었다. 공장이 가동 될 때에는 모든 생산자재가 컨테이너에 실려 이곳에 도착 할 것인데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여기서 수출공단까지의 거리는 4~6km 이다. 다만 막탄 섬으로 오가는 다리가 왕복 2차선 하나뿐이니 심각한 교통 체증이 우려 되므로 여기에 대한 대비는 필요해 보였다. 위와 같은 사항들을 조사하느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나는 참으로 신이 났다. 버스공장에 이어 부평공장 르망 생산을 위해서 체험한 일들이 생생하게 뒷받침 되었다.

나는 종합 보고서를 주도적 역할을 하여 완성하였고 이를 이지사장님께 보고 하였다. 지사장님은 대단히 만족하였다.

보고를 마친 이날 저녁 식후 LBQ와 지사장님은 여흥을 베풀기 위해서 가라오케를 찾았다. 건물에 내 걸린 간판이름이 '사운드 오브 뮤직' 이다. 건물 전체가 다 가라오케 영업을 하는 곳으로 보인다. 1층 로비에 들어서니 수십 명의 아가씨들이 의자에 앉아 있다. 지사장님은 한 아가씨를 골라서 손을 잡고 이층으로 올라가신다. 나머지 사람들도 각자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골라서 따라 올라갔다. 안내된 방은 한국사람 전용인 모양으로 노래 곡 목책이 모두 한글로 되어 있었다. 음악이 나오자 나는 앞으로 나가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분위기를 끌어가는 데는 적극적이고 활발한 것이 좋다. 나는 '아파트'를 선곡하였다. 노래하면서 몸을 흔들기에는 안성맞춤이고 또 다른 사람들을 춤판으로 유도하기에는 아주 좋은 곡이다.

모두 한바탕 춤을 추었다. 놀 때는 즐겁게 놀아야 하는 것이다. 한국 노래를 모르는 LBQ는 팝송을 불렀다. 이보다 더 좋은 여흥은 없다. 이곳에서도 이지사장님은 나를 보고

"일을 잘 하는 사람은 놀 때도 잘 논다."

면서 벌써 세 번째 칭찬을 여러 사람 앞에서 해주셨다. 일어 설 때쯤 아가씨에게 팁을 200페소 (약 5,000원) 만 주라고 하여 그렇게 하였다. 200페소를 받은 아가씨들 모두가 만족한 표정들이다.

5. 뱃 놀이

호텔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는 간단한 양식이었다. 빵과 우유와 야채, 그리고 과일과 커피 등이었는데 여러 가지 과일이 준비되어 있었다. 망고는 이미 맛을 보았지만 다른 과일들은 이름을 몰랐다. 그래서 한 가지씩 먹어 보아서 맛이 어떤지 알아보았다. 열대 과일들이라 단 것이 많았다.

아침 식 후 이지사장님은 먼저 마닐라로 떠나셨다. 이런 말씀을 남기고.

"오늘 낮에는 트란스팜(Transfarm)이 뱃놀이를 시켜준다고 하였으니 마음껏 해수욕도 즐기고 잘 놀다 오시게."

해수욕도 할 수 있다 하였으므로 호텔 매점에 가서 판츠랑 썬글라스, 넓은 타월도 모두 준비하였다. 10시쯤 되니 픽업 차가 왔다. 거리 풍경은 이미 눈에 익었다. 막탄 섬 동쪽 한 해변에 허드슨 비치(Hudsan Beach)라고 간판이 붙은 곳으로 들어간다. 얕은 바다 가까이에는 배 좌우에 대나무를 매달아 바란스를 잡고 있는 작은 놀잇배 들이 줄을 지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배 한 복판에 흰 텐트를 쳐 놓아 그늘을 만들고 그 밑에 사람들이 마주 보고 앉아있다. 조금 뒤 조그만 배 한 척이 노를 저어 와서 우리 네 사람을 태운다. 그리고 바다 훨씬 저 안쪽에 있는 큰 배에다 태워준다. 배 위에는 발보나(Balvona)부사장과 또 한 젊으니 솔(Sol)이라고 불러 달라는 사람이 타고 있었다. 이 배는 제법 큰 배이다.

배는 바다 복판으로 물살을 가르며 나아간다. 배를 운전하는 선원 두 사람이 호흡을 잘 맞춘다. 시원한 바닷바람에 땀이 스스로 말라간다. 파란 물이 곱고 맑다. 한참을 달린 배는 저 멀리 보이는 섬 앞에서 정박을 하였다. 우리는 이미 해수욕 판츠를 입고 타월은 등에 두르고 썬그라스를 끼고 있었다. 승무원 두 사람이 선실에서 먹을 음식들을 날라다 갑판 위 탁자에다 늘어 놓는다. 통 돼지 바비큐(Lechon) 한 마리가 먹음직스럽게 탁자 한 가운데 놓여있다. 통닭 바베큐 2마리도 있고 야자 잎사귀를 마름모꼴로 접어서 만든 것이 주렁주렁 꿔메어 있는데 이것을 핸깅 라이스(Hanging Rice)라 불렀다. 아이스 박스엔 맥주가 가득 들어있다. 선원들이 레천(Lechon)을 보기 좋고 먹기 좋도록 잘라서 접시 몇 개에 담아 늘어놓고 핸깅 라이스를 칼로 잘라서 안에 있는 내용물을 꺼내 놓으니 영락 없는 주먹밥이다. 함께 먹을 소스를 만드는 것을 보니 간장 같은 것을 접시에 붓고 아주 작은 빨간 고추(칠리)를 넣어 이기고 그 위에다 탱자 같은 것(칼리만시)을 반으로 쪼개 물을 짜 내어 또 위에 뿌린다.

맛을 보니 시큼 매큼한데 고기와 함께 먹으니 모두 함께 어우러져 희한한 맛을 낸다. 이것은 해수욕 할 때나 야외 나들이 때 먹는 전통 음식이라 한다. 배불리 먹고 물속에 풍덩 뛰어 들어 헤엄을 치니 이 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을까?

6. 합작투자지분

트란스팜 사람들은 우리 일행을 이처럼 극진하게 대접하여 주었다. 마닐라로 다시 돌아왔다. 이어 첫날 들렀던 트란스팜 사무실로 가서 본격적인 상담에 들어갔다. 먼저 투자 지분에 대하여는 이들이 제시한 대우;트란스팜 70:30으로 결론이 났다. 그런데 공장을 세우기 전에 르망을 수입해서 먼저 팔아보겠다고 제의를 해왔다. 공장을 세워 차량을 생산하기 까지는 최소 일년은 소요되어야 할 것임으로 먼저 팔아 보아서 시장의 반응을 알아보겠다는 속셈이었다. 먼저 수출을 하는 것은 ㈜대우나 대우자동차가 굳이 마다 할 필요가 없는 사항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예가 있었다. ㈜ 대우 마닐라 지사장은 수출가격 견적서를 제출하였다. 그들은 가격이 터무니 없이 비싸다고 펄쩍 뛰었다. 그리고 당장 돈이 없으니 당분간 외상으로 하자는 요구조건들을 내세웠다.

차량 가격이나 지불 조건에 대해서는 서울로 가서 논의를 하자고 하여 일단 첫 출장 업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서울역 앞 ㈜대우 빌딩 12층에 해외 프로젝트 총괄 사무실이 있었으므로 출퇴근은 쉬워졌다. 1년 반 동안 판매생활의 고달픔이 아득한 추억으로 남았다. 전보발령을 받고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한 원당영업소 배 소장에게 비로소 전화를 걸었다. 김동진 대리가 문산영업소를 인수를 해서 독립을 하였으며 정지수 대리는 부평공장으로 원대 복귀하였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배소장이 잘 돌봐주어서 그곳 생활을 잘 하였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하였더니

"제가 잘 해 드린 것은 없고 오로지 형님께서 누구보다 열심히 하셔서 판매실적이 좋았던 것임니더. 사실 본부장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형님을 지켜보고 있었으며 만일 그냥 계셨더라면 곧 영업소장 자리를 맡아 나갔을 낍니다. 형님, 축하합니다. 아무튼 성공하십시오."

영업소장 자리를 맡아 나갔다 했더라도 그것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자리다. 나는 이번 출장길에서 그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한방에 다 날려버린 것이다. 가슴이 시원하다. 돌아오는 길엔 진귀한 토산품 진주 목걸이를 아내에게 선물하였다.

7. 공장 건설 계획

대우가 주도권(Majority)을 갖는 70:30 투자조건은 대우가 주도적으로 투자를 하여 대우의 계획대로 일사불란하게 프로젝트 업무를 수행한다는 뜻이다. 이번 출장길에서 조사한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투자 계획을 입안하였다.

일단은 모든 자재 일체를 CKD(Complete Kock Down)상태로 수출하는 것으로 대전제를 하였다. 엔진, 서스편션, 프레스 부품은 모두 CKD이다. 그러니 현지 공장은 차체 용접라인, 도장 라인, 그리고 의장완성 조립 라인과 차량 검사라인 등만 설치하면 되는 것이다.

5Job Layout를 완성하여 나갔다. 따라서 공장 건물과 부속 건물의 크기가 결정되고, 기계 장비, 도장설비, 공정간 운반수단 등 모든 것이 결정되니 총투자 금액을 산정하였다. 다시 이런 일을 하니 신이 났다.

공장 설립 계획을 세웠다. 차체 용접 Jig 와 도장설비의 발주 제작 운송, 통관, 설치 등의 일정과 대우건설과 협의하여 건물의 개략적인 모양 설계 자재운송 통관 건설 등과 현지 인원 채용 교육 훈련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연수 등 실로 방대한 사항들이 총망라된 일정 계획을 세워 보고하여 최종 왕부사장의 승인을 받았다.

나는 일을 시작한지 3개월 만에 이 계획을 완성하였다. D-day만 정해지기만 하면 바로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내가 이런 일을 해놓는 동안에도 대우와 트란스팜 간의 르망 수출 가격, 대금지불 조건 등에 대한 협의가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또 이성수부장은 합작투자 계획서를 만들고 MOU 까지 맺는 성과는 있었으나 정식 계약 체결에는 트란스팜 측에서 계속 뭉개고 있어서 결과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운 시간들이 흘러갔다. 파트너 측에서는 필리핀 내에서 자기들만이 자동차 조립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우가 다른 대안이 없을 것이므로 어려운 조건을 내걸고 버티기 작전을 펴는 동시에 내부적으로 완성차 수입에 따른 통관세를 줄이기 위하여 밧테리와 타이어가 없는 SKD(Semi Knock Down)상태 수입 승인을 받기 위하여 BOI와 밀실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LBQ의 작전은 묘하게 양쪽 다 성공을 거두었다. 대우 김우중 회장님이 용단을 내려 가격을 흡족할 만큼 D/C해 주었고 지불 조건은 6개월 D/A(외상거래)를 해 주었다. 그런 한편 BOI의 SKD 수입승인을 받아 낸 것이다.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은 것이다.

8. SKD 수출

여기까지 오는데 6개월이 소요되었다. 6월 달에 출장을 다녀왔으니 12월이 되었어야 자동차 수출을 먼저 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공장을 건설하는 일은 일단 제쳐 두고 엉뚱하게 SKD 수출에 따른 문제점을 해결해 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밧데리와 타이어 없이 수출하는 것은 일견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인천 항구까지 일단 완성차로 가서 밧테리와 타이어를 제거 하여야 하는데 대우가 계약한 운송선에 따라 방법이 달라질 수 있었다.

㈜대우에서 선사 계약을 하였다는 연락이 왔다. 선사 직원을 내 사무실로 불러서 차를 싣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차를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서 선실에 일단 내려놓은 다음 차를 운전해서 정해진 위치로 이동한 후 라싱(체인으로 네 바퀴를 묶어 고정하는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완성차를 부두까지 카 캐리어로 차를 싣고 가서 부두에 하역한 다음 선적하는 작업순서를 수출부, 자재부, 조립부 직원들과 회의를 한 결과 이렇게 정했다.

1.바퀴를 탈거한다.

2.타이어와 휠디스크(Tire와 wheel Disk)를 분리한다.

3.휠디스크(Wheel Disk)를 재조립한다.

4.차량을 크레인 위치로 운전을 해서 이동한다.

5.특수 제작된 행거(Hanger)를 사용하여 차를 선실로 들어 옮겨놓는다.

6.차를 운전을 해서 정해진 위로 이동한다.

7.라싱을 한다

8.밧테리를 탈착하여 배 밖으로 이동한다.

9.타이어와 밧테리는 공장으로 이동하여 재사용을 한다.

간단한 일 같지만 이런 작업이 필요 했던 것이다. 이어 나는 특수 행거를 설계하여 두 벌을 만들어서 하나는 국내에서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필리핀으로 보내도록 조치하였다.

차가 도착하기 전에 차량 정비요원들을 트란스팜에게 채용하도록 하고 해외정비 기술부의 정비교육 기사와 함께 교육 자료를 지참케 하여 두 번째 출장길에 올랐다. 마닐라 지사장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고 세부로 떠났다. 한국 세부간 직항 노선이 없기 때문에 마닐라를 거쳐 가야 했으므로 이틀이 소요되었다.

사장 LBQ와 부사장을 다시 만났다. 교육 받을 인원을 점검해 보니 솔(Sol)이 포함되어 있었다. 솔(Sol)이라는 사람은 뒷날 많은 일을 하였다. 내가 요청한대로 20명을 선발해 두었는데 대부분 대졸 출신들이었다. 해외 정비부의 교육 담당자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다. 교육은 잘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나는 차량하역작업 시 작업해야 할 내용을 설명하였다.

예정대로 배가 도착하였다. 하역 후 휠디스크를 탈거해서 타이어와 조립하고 이를 차에 장착하는 일과 밧테리를 장착하여 시동을 걸고 운전하는 일을 감독하였다. 모든 작업은 계획한대로 무사히 마쳤다. LBQ는 나에게 감사하는 말과 나의 노고를 치하해 주었다. 첫 단추는 잘 끼웠다.

필리핀에 처음 수출한 차량은 르망인데 이를 레이서(Racer)란 이름으로 라벨을 붙여 나갔다. LBQ는 합작 투자 계약서에 서명할 생각은 없고 차량을 파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시장의 반응을 예의 주시하면서 신중한 행보를 이어갔다.

언제 D-day가 정해질지 모르는 나는 좀 답답한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내가 할 일이 없는 것이다. 개점휴업이라고 할까?. 나는 베트남 프로젝트는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을 보고 대단히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다 같은 5Job 짜리 공장이니 베트남의 래이아웃이 어떻게 되었는지 넘겨다보았다. 별로 틀리는 것은 없었다.

9. 투자지분 변경

대우 마닐라 지사에서는 래이서의 판매 추이를 추적(Monitoring)을 하고 있으면서 그 결과를 속속 보고 하여왔다. 시장의 반응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에어컨의 성능이 우수해서 강점이라고 하였다. 판매가 시작한지 한 6개월이 지난 시점 LBQ는 새로운 제안을 해온 모양이다. Racer가 잘 팔리니 욕심이 난 것인지 자기들이 Majority를 갖겠다고 나섰다. 대우 30 Transfarm 70의 투자 비율 수정 제의를 해 온 것이다. 대우는 Majority를 내 준 곳이 한 곳도 없으므로 대단히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Majority를 넘겨주면 대우가 일하기가 어려워 지는 것은 당연하다. 곧 내가 일하기가 무척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된다. 공장건설과 생산기술이 없는 그들이 내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간섭이라도 할 것 같으면 일이 힘들어 질 것이 분명하다.

대우 마닐라 지사장님이 LBQ의 진의가 무엇인지 파악하기에 분주하였다. 행정 일에 관여하지 못하는 나는 매일 이부장과 지사장사이의 전화통화에 귀를 기울 때가 많아졌다.

대우는 결국 그들의 제의를 수용하고 말았다. 이 부장은 계약서를 고치느라 분주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Majority를 움켜 쥔 그들은 막탄 수출 공단에 입지를 정한 나의 계획을 완전 무시해 버리고 콤포스텔라(Compostela)에 있는 자기의 땅에다 공장을 짓겠다는 통보가 왔다. LAYOUT 설계를 다시 해야 하므로 나는 필리핀 출장을 갔다. 그들의 땅을 둘러보았다. 땅의 생김새가 자동차 공장을 세울 곳이 못 되었다. 나는 지적도를 요청해서 받았다. 그 지적도 위에 공장 건물의 위치를 그려 넣어서 자기들 땅이 아닌 곳을 토지를 매입 수용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리고 필요한 전기용량과 공업용수 자료를 산정하여 주었다. 그리고 LBQ에게 수출공단에 입주하셨을 때 지불할 임대료와 자기들 땅에다 새롭게 투자하여야 할 쇼설 인프라 구축 비용, 물류 비 차이를 비교해서 이익이 되는 쪽으로 공장입지를 선택해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그는 알았다고 할 뿐 별 말이 없었다. 나는 새로운 래이아웃과 마스터 플랜을 제시하였다. 그들이 Majority가 되었으므로 내가 할 일은 그것뿐이고 그들이 D-day만 정하면 나는 Master Plan에 따라 지원해야 할 생산기술에 차질이 없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10. 회장님의 현지 방문

출장에서 돌아온 나는 그들이 D-day를 정해서 통보해 주기를 기다렸으나 소식이 깜깜하였다. 그러던 중 김우중 회장님께서 세부를 방문하는 일정이 왔다. 나는 네 번째 세부 출장길에 올랐다. 먼저 가서 공장을 지을 부지에 대한 정지작업을 확인하고 회장님께 현장을 설명해 드려야하기 때문이었다.

가서 보니 아무것도 진척 된 것이 없었다. 내가 매입 수용하도록 일러준 것도 이행하지 않았다.

내가 설계한 래이아웃 대로 공장건물, 자재 창고 및 사무실 등이 들어설 위치를 말뚝을 박고 줄을 쳐서 쉽게 설명을 드릴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였다. 물론 래이아웃 도면을 크게 그려서 걸어놓고 트란스팜 소유 부지와 매입 수용해야 할 토지도 알기 쉽게 표시하였다. 마스터플랜(Master Plan)도 간단히 설명 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김우중 회장님은 예정대로 공장을 지을 곳으로 방문하였다. 여러 임원들을 대동하고 오셨다. 이곳 회장의 개인 별장 같은 응접실로 들어오셨다. 나는 그곳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준비한 래이아웃 도면에 따라 설명하여 드렸다. 김우중 회장님은 현장을 둘러보시겠다고 하시므로 내가 앞장을 서서 나아갔다. 부지에 이미 각 건물의 위치와 건물명의 개요를 기록하여 세워 두었던 것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회장님은 아주 꼼꼼하셨다. 세밀한 곳까지 두루 살펴보시고 의문이 나는 사항은 질문하셨다. 거의 다 둘러보시고는 몇 가지 검토지시도 내리셨다. 그렇게 2시간여 동안 꼼꼼히 챙기시는 모습에 나는 새삼 놀랐다. 더운 날씨에 와이셔츠가 땀으로 흠뻑 다 젖었다. 회장님의 수행비서가 이럴 때 대비해서 갈아입으실 와이셔츠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회장님이 검토해 보라는 사항을 놓고 다시 래이아웃을 이리저리 수정해 보았는데 역시 회장님의 견해가 더 나았다. 평생 이런 일만 해온 나보다 더 나은 아이디어를 내 놓으신 것이다. 회장님께서는 세계 여러 나라의 공장들을 둘러 보셨기 때문에 비교 할 수 있는 식견을 가지셨던 것이다. 한 기업의 총수가 세밀하고 꼼꼼하게 챙기시며 땀 흘리는 모습이 나의 뇌리에 두고두고 잊혀 지지 않았다.

11. 기공식

몇 달 뒤에 기공식이 있었다. 난 또 출장을 갔다. 회장님이 또 오셔서 기공식 전날 나를 대동하고 사전 현지답사를 하셨다. 검토지시 하셨던 사항에 대하여 수정 보안한 사항을 잘 말씀을 드렸음은 물론이다. 회장님은 고개를 끄덕이시고 다른 말씀은 없었다.

기공식 날엔 정부 고위 공무원들은 물론 세부 지방 유지들이 대거 참석했고 보도진들이 엄청나게 모여들어 취재를 하였고 이날 신문에는 대서특필이 되었다.

기공식까지 하였지만 트란스팜은 더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반년이나 지난 후 이번에는 공장 부지를 새로 확보하였다는 통보가 왔다.

나는 또 출장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아주 넓은 땅을 확보하고 있었다. 먼젓번 부지에서 북쪽으로 3Km정도 떨어진 곳이다. 부지 모양이 거의 사각형이다. 이번에는 래이아웃을 마음껏 멋을 부리면서 완성하였다. 만약 김우중 회장님이 다시 와 보신다면 흡족하시리라 믿었다. 트란스팜은 내가 머무는 동안 중장비를 동원하여 부지 정리를 진행하였으며 외곽에는 벽을 쌓았다.

그리고 곧 D-day를 통보해 왔다. 건물 설계가 우선이었으므로 나는 대우자동차 공무과 직원과 대우건설 직원을 대동하여 필리핀 출장 길에 또 올랐다. 트란스팜이 설계를 맡긴 회사의 직원하고 함께 설계기준 사항들을 하나하나 토의하면서 정해 나갔다. 이제 정해진 대로 설계를 하고 건축을 하면 되는 것이다. 또 한 번의 기공식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나는 가지 않았다. 국내에서 할 일이 많았으므로 갈 수가 없었다. 지난 해 승진한 이성수 이사만 참석하였다.

12. 장비 발주

기계 장비를 발주하는 일이 닥쳐왔으므로 그 일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기가 제일 긴 도장 설비의 발주부터 먼저 진행하였는데 이 일의 주관은 최선명 부장이었다. 그는 부평공장 생산 기술 담당에 근무 중 이었다. 이즈음 해외 프로젝트 총괄 담당의 사무실은 부평 공장 옆 한독 실업 건물을 인수하여서 이곳으로 이전하였던 것이다. 직원들도 엄청나게 불어나 있었다. 필리핀 팀에도 과장 한 사람과 사원 두 사람이 보충되었다. 공장하고 가까우니 수시로 드나 들기가 편해졌고 나도 복잡한 전철을 타고 출퇴근해야 하는 어려움을 들었다. 최선명 부장이 도장 설비의 사양을 결정하기 위하여 현장을 방문해야 했으므로 나는 그를 데리고 또 출장을 다녀왔다. 그 때 가서 보니 공장 건물 공사를 진행 중이었는데 기둥이 설 자리의 기초공사가 한창이었다.

모든 기계장비(Machine & Equipment)의 발주가 속속 이루어졌다. 기계장비를 설치할 기초공사도면과 지하로 들어갈 유틸리티(Utility)모두 설계가 완료되어 트란스팜에 넘겼다.

일정에 따라 공장을 가동할 핵심인력의 교육을 진행하게 되었다. 필리핀에서 5명의 인원이 선발되어 부평공장으로 들어왔는데. 바칼소(Bacalso), 케네다(Kennedy), 테오(Teo), 알프렛(Alfred)과 다니(Danny)등을 현장 작업장에 투입하여 작업을 하게 하였다. 당시엔 공장 동편 갈산동 대우아파트 부지에 기숙사를 지어 폴란드를 위시한 세계 각 국의 근로자들을 수용하고 있었는데, 필리핀에서 온 6명도 3개의 방을 배정받았다. 한 동안 부평의 거리는 외국인들의 물결로 넘쳐 날 지경이 되었다. 바칼소(Bacalso)에게는 생산부장을 맡기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5명이 하는 일을 매일 검토해서 전체를 알아야 한다고 연수목표를 정해주었다. 나머지 네 사람에게는 차체조립. 도장, 조립, QC 각 분야에 배치하였다. 앞으로 과장으로 일하게 될 것임을 분명히 해 두었다. 그러므로 한 기숙사에서 숙식을 하고 있는 여러 국가에서 온 기능직하고는 분명 차이가 있으니 품위를 지켜주도록 당부하였다. 그리고 연수일지를 기록할 수 있도록 양식을 만들어 주었다. 신공장 가동 시에는 현장 기능직을 손수 가르쳐야 하므로 이 다섯 사람들은 모든 작업을 손에 익히려고 애 쓰는 것을 나는 지켜보았으며 혹시 불편하거나 의문이 있는 지를 매일 점검 하였다.

도장 설비는 조명 열기라는 회사가 수주하였는데 수시로 제작과정을 지켜보았다. 차체 조립 JIG는 시화 공단에 있는 한 업체가 수주를 받았다. 다른 검사장비나 치공구들은 단품을 구매하면 됨으로 별 문제점이 없었다.

조영 열기에서는 납품 일정에 따라 설비제작을 완료하였다. 다 완료해서 수출 포장까지 하고 보니 포장 개수도 엄청나게 많았고 부피 또한 컸다. 차체조립 JIG도 제작이 완료되어 포장되었다. 그런데 트란스팜쪽에서 기계대금을 지불하지 않아서 선적을 할 수 없었다. 조영열기 측에서는 선적을 기다리다 할 수 없어서 인천부두 가까운 곳에다 별도로 보관장소를 마련하여 모든 장비들을 옮겼다. 왜냐하면 자기들 공장을 비워야 다음 설비를 제작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포장 박스를 옮기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저상 트레일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먼저 현지 부임한 이성수 이사가 트라스팜 측에다 장비대금지불을 독촉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3개월이 지연된 시점에서 조영열기는 현재 보관장소의 임대비용이 너무나 과다하니 이를 어떻게 처리 할 것인지 대책을 요구하여 왔다. 당연한 것이다. 보관비용과 운반비용은 별도 추가로 발생한 것임으로 설비업체가 일방적으로 부담하기에는 무리였다. 나는 생각했다. 언제 선적할 날짜가 정하여 질지 모를 상황이었으므로 시외 한적한 곳으로 이동해서 야적하기로 결정했다. 운송비는 소요되지만 보관비용은 대폭 줄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13. 박동규 사장님의 현지 방문

대우 조선에 계셨던 박동규 사장님이 해외 프로젝트 총괄 사장님으로 오셨다. 난관에 봉착해있는 필리핀 현황을 두루 파악하셨다. 장비 야적장을 나를 앞세워 찾아보기도 하셨다. 그리고 트란스팜에 보내는 공문을 손수 작성하셔서 나에게 주었다. 필리핀으로 출장가기를 결심하셨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장님을 수행하는 비서 역할로 출장길에 올랐다. 비서가 할 일은 사장님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일이다. 우선 필리핀 기후에 대해서 말씀드렸다. 더운 것이 우리나라 한 여름과 같으니 여름옷을 준비하시도록 말씀드렸다. 양복 정장을 그대로 입고 게셨다가 마닐라 공항에 도착해서 비행기에서 내릴 때에는 여름옷으로 바꿔 입으시도록 당부도 드렸다. 그런데 사장님께서는 나의 이 당부를 깜빡 잊으셨던 모양으로 입국장에서부터 연신 굵은 땀을 흘리시니 보기에 민망하였다. 게다가 마닐라 지사에서 김과장이 픽업 오기로 되어있었는데 5분 10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더 기다리다 못하여 택시를 잡았다. 그렇게 하기를 잘 하였다. 픽업 차량이 오는 도중에 고장이 났었다고 뒤 늦게 사무실로 들어온 김과장이 숨차게 말하였다. 마닐라 지사에 먼저 들렸던 것이다. 새로 부임한 지사장 유상무님을 처음 뵈었다. 앞서 이지사장님께서 나에게 호의와 칭찬을 아끼지 아니 하셨는데 도중하차하신 것이다. 난 좀 섭섭하였다.

첫 대면 LBQ와는 저녁식사를 하였고 내일 새벽 골프를 약속하는 것으로 끝났다. 같이 돌아와서 호텔에 투숙하였고 이튿날 박사장님이 새벽 일찍 골프장으로 가실 때 짐을 받으려 사장님 방을 방문할 시간을 말씀드려놓았다. 왜냐하면 골프가 끝나면 바로 세부로 가는 국내선 대합실로 오시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장님 짐을 받아 있다가 시간에 맞추어 공항으로 가면 되었다.

다음날 LBQ는 우리와 동행하여 세부로 향하였다. 박사장님께서는 현장을 보고 싶어 하셨으므로 먼저 콤포스텔라로 갔다. 공장 건물만 덩그랗게 완성해 놓고 바닥 공사나 내부 길 포장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사장님을 앞장서서 공장 래이아웃의 개략적인 설명과 바닥공사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드렸다. 마스터플랜에서 이미 일년 가까이 지난 싯점이었으니 한심한 상황이었으므로 사장님께서는 LBQ가 과연 공장을 지을 생각이 있는지 따져 물었다. LBQ는 연신 허리를 조아리며 일정만회할 계획(Catch Up Plan)을 세워서 차질없이 진행하겠다고 나섰다. 옆에 있던 발보나(Balvona)에게 그 계획 을 세우라고 지시하였다. 박사장님께서는 수정된 계획을 놓고 회의를 진행하자고 하셨다.

발보나 사무실에 가니 그는 내가 만들어 준 마스터 스케줄(Master Schedule)을 놓고 그것을 수정하느라 끙끙대고 있었다. 그는 도장설비 기초공사를 턱없이 짧게 잡았다. 공사의 개요를 모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점을 지적하면서 하나하나 할일들을 세분해서 새로운 계획을 만들도록 도와주었다.

'14. 주재원으로 부임

박사장님은 장비를 선적하도록 지시하였고 나를 장기 출장을 시켰다. 사실상 주재원의 역할이다. 장기출장자가 되니 출장비 중 호텔 투숙비가 이전의 200불에서 50불로 대폭 삭감되었다. 좀 섭섭했지만 다른 나라와의 형평도 고려한 것이라 한다. 내가 관심을 가졌던 장비 대금결제 부분은 여전히 미결인 상태로 LBQ가 약속하는 말을 믿고 박사장님이 용단을 내리신 것이다. 나는 이 점이 필리핀에 왔어도 내내 걱정이 되었다. 왜냐하면 장비 값이 5백만불에 달하는 거액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장비를 선적한 뒤 나는 곧이어 필리핀으로 왔던 것이다. 트란스팜의 기초공사를 감독하고 또 독촉하였다. 이번에는 라울(Raul)이라는 사람을 건설책임자로 채용하여 나와 함께 일하게 되었는데 그는 열심히 하고 싶지만 현지 사정이 따라주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

제일 큰 애로는 콩크리트를 만드는 공장의 능력부족이었다. 라울은 회사로 출근하는 대신 콩크리트 공장으로 바로가서 독촉을 거듭하였고 나는 현장에서 콩크리트 타설작없을 진행하였다.

장비가 세부항에 도착하였다. 공장내부에 포장 박스를 정리하기 위하여 미리 마킹을 해 두었고 선적시에 이미 부여한 포장 No를 페인트로 써 두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내가 처음해 보는 일이지만 설치시 해당기계를 손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는 아이디어이었다. 부평에서 6개월 연수를 마친 직원들이 돌아와 있었으므로 모든 일을 이 사람들에게 시켰더니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졌다.

장비 박스가 항구에서 운반되는 즉시 그것을 공장 내부 지정된 곳에 착착 들여 놓았다. 누가 봐도 질서정연하게 정리하였다. 곧이어 필리핀에 온 조영열기의 설치 총 감독자가 장비박스가 이렇게 정렬되어 있는 곳을 보고 나에게 많은 찬사를 보냈다. 그는 이미 다른 나라에 가서 설치를 완료한 경험이 있었는데 장비 포장 박스를 아무렇게나 두어 찾는데 무척 애로가 있었다고 했던 것이다. 도장설비는 턴키(Turn Key) 방식이었던 것이다.

조영열기의 감독자와 설치 작업자들이 머물 셋집을 구해주고 시장에 가서 장을 보는 일과 이 곳 생활 습관에 익숙해 질 때까지 그들을 도우느라 한 동안 바쁜 나날을 보냈다.

조영열기는 먼저 전처리 탱크(Tank)를 만드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들은 한국에서 탱크를 만들 자재를 절단하고 절곡(Bending)만 해서 싣고 왔던 것이다. 그러니 현장에서는 그냥 용접 작업만 하면 되도록 한 것이다. 한 동안 탱크 만드는 일은 잘 되어 갔다.

1997년 1월초 아내는 막내딸 소영이를 데리고 필리핀 비행기에 올랐다. 내가 필리핀 일을 시작한지 꼭 3년반이 지났어야 주재원 가족으로 오게 된 것이다. 필리핀 파트너가 변덕을 부리지 아니했더라면 벌써 오래전에 이루어졌을 일이었다. 그 동안 필리핀으로 출장을 온 일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셋째딸 계수가 따라오지 않은 것은 좀 의외였다. 이미 산카로스 대학에 다닐 수 있도록 다 조치를 해 두었는데 말이다. 계수는 이때 따라나서지 못한 것을 훗날 많이 후회하였다. 넷째 선희는 대학 3학년에 재학중이었으므로 휴학계를 낸 후 3월초에 필리핀으로 오게 된다. 편입학할 수 있도록 미리 조치를 하였고 한국에서 준비해올 서류들을 알려 주었다.

조영열기가 전처리 탱크를 완료할 무렵 트란스팜은 돌연 공장 건설을 중지한다고 선언해 버렸다. 이유인 즉 CKD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것이다. 대당 1500불을 D/C를 요청하였으나 주 대우에서는 일언지하 거절하였다고 한다. 이성수 이사는 마닐라로 출장을 가서 지사장님과 부지런히 대책을 논의하였으나 해결점을 찾지 못하였고 따라서 트란스팜은 조영열기가 하던 공사를 일시에 중지시켜 버렸다. 본사 해외 프로젝트 본부에서도 사태가 심각함을 인지하여 장비 설치 잠정 중단 결정을 하였으며 조영열기는 하던 일을 정리하고 모두 철수해 버렸다.

나는 심각히 고민을 하지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장기적으로 공사 재개가 없으면 내가 할 일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난감한 일이다.

나는 트란스팜의 작태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1997년 8월11일자 나의 일기를 보자

Aug. 11. 1997. 월

트란스팜 속셈은 정말 무엇이라고 하여야 하나?

그들에게는 지금 자동차 CKD공장을 건설하는 것이 절대로 바쁜 사항이 아니다. '엔高'시절 SKD판매에서 엄청난 이득을 챙긴 그들로서는 지금 배가 부르다. SKD이득의 달콤한 맛을 잊지 못한다. 합작회사 파트너인 트란스팜은 너무 쉽게 자동차 사업(단지 판매만을)에 접근하였다. 이 나라 정부 BOI (BOARD OF INVESTMENT)의 엄청난 특혜를 입었다.

"타이어와 밧테리가 없는 차가 어떻게 SKD가 될 수 있느냐"는 경쟁 업체들의 맹렬한 항의를 BOI가 바람막이를 해주어서 관세 3%만 부담하고 폭리를 취해왔던 것이다. 앞으로 CKD공장을 경영하자면 관세10%와 제도경비가 추가로 부담된다. 그렇다고 CKD 가격에 큰 장점(MERIT)가 있는 것도 아니다. SKD에 비하여 겨우 US0이 싼 것뿐이다. 이래서는 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아직도 대당 US,600~1,800의 인하를 대우자동차에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트란스팜은 SKD를 팔아 먹던 재미(?)를 결코 잊지를 못한다. 그리고 CKD를 해서 확실한 이익 보장이 없는 한 공장을 지을 생각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 트란스팜이 공장을 지을 생각이 있다면 6월 초에 나와 협의해서 만든 마스터프로젝트 스케쥴(MASTER PROJECT SCHEDULE)에 의해서 공사를 진행하여야 옳은 순서일 것이다. 즉 공기가 제일 긴 폐수 처리 공사부터 먼저 발두를 하여야 하고 그 다음은 전기공사와 내부 길 공사 등이며, 내부 파이핑공사, 핸깅스럭처(HANGING STRUCTURE)공사 및 유틸리티 센터 빌딩(UTILITY CENTER BUILDING)공사 등, 자기네 할 일을 차레로 하고 있으면 대우 자동차에서는 때를 맞추어 기계 장비를 설치할 것인데, 거꾸로 대우의 장비 설치를 먼저 요구한 것은 반드시 이를 핑계로 하여 공장 건설을 늦추겠다는 속셈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빈 껍데기 기계 설치를 먼저 해서 BOI에 보이기(SHOWING)를 하겠다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자기네 정부 사람들에게 뭔가 속여서 BOI의 독촉에 구실만 만들어 어물쩍 넘어가보자는 계산이다. 이들은 공장을 지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한편 판매에도 적극적이지 못한 것 같다. 신문이나 TV광고 한번 하는 것 못 봤다. 거저 팔리는대로만 그냥 팔고 앉아 있을 뿐이다. 대우의 가격만 인하해 주면 그것이 판매 정책의 모든 것인 양 거저 가격만 인하하여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을 따름이고 정작 자기네들이 할 일은 하지 않고 있다. 1997.8 10자 선스타(SUN STAR)는 지난 7월 시장수요가 16%가 신장하여 국내 신차 판매가 8,500대에 달한다고 보도하는 것을 읽은 일이 있다. 트란스팜은 80대 판매에 그쳤으니 0.1% 에도 밑 돈다. 초기 5~6%수준까지 달성한 때를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노릇이다.

지금 트란스팜 사장 LBQ는 [지금까지의 판매로 돈을 벌어 들일만큼 벌었다. 지금부터는 바쁠 게 없다.] 고 생각하고 있음이 틀림 없다.

대우는 더 이상 끌려가지 말고 여기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런 배은 망덕한 자들하고는 더 이상 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

그로부터 한 달 후 합자회사 트란스팜과의 관계는 악화되고 있었다. 앞서 8월11일 자 나의 일기에서 본 바와 같이 나는 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합작회사가 파탄이 나면 나와 가족들은 귀국해야 한다. 귀국 후 나의 회사 생활이 지속될 것인지, 아내의 건강관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내 소영이의 전학문제가 잘 해결될지 등등 앞 일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파탄은 막아보려고 LBQ의 사무실을 들락거리면서 설득에 나섰으나 모두 허사였다. 나는 비장한 각오로 왕영남 부사장에께 현상파악과 대책으로 대우가 Majority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현재의 합작비율을 바꾸어 대우가 70이상을 가져야 대우의 계획대로 자동차사업을 추진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나의 이 건의가 받아들여졌는지 10월 하순엔 김우중회장님이 필리핀의 투자청장관( BOI)을 서울로 초청해서 현안타개에 나섰다. 그 뒤 LBQ가 서울로 가서 김회장님께 지금까지의 잘못을 사과하고 Majority를 넘기겠다고 약속하게 되었다. 이제 일이 풀리는가 싶었다. 그렇지만 필리핀으로 돌아 온 LBQ는 대우에게 Majority와 자동차 조립 라이선스를 넘기는 대가로 미화 250,000불을 요구했다. 이 엉뚱한 요구에 대우의 경영진이 대노하였고 그 다음 달 하순에 사업중단을 선언하여 버렸다.

"파트너를 잘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은 다 자네 복이야" 하셨던 왕 부사장님의 말씀이 떠올라서 내 복은 여기까지로구나 생각하였다.

15. 파탄 그리고 귀국

꼭 1년 만에 필리핀에서 철수하였다. 선희는 산카로스 대학의 3학년 학기를 마치고 귀국하는 것이 바람직해서 3월초에 뒤따라오기로 하였다. 하숙집을 구해 주었다.

나는 이란 프로젝트로 전보발령을 받았던 것이다. 이성수 이사는 배선공장의 뒷 처리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대로 잔류하였다. 그러나 불안을 느낀 것은 마찬가지인지 가족들을 먼저 귀국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귀국 이삿짐은 한 컨테이너에 실었다.

필리핀 담당 윤병철 이사는 우크라이나로 전보되어 떠나고 없었고 이정훈 이사가 필리핀 업무를 임시 대행하고 있었다. 국내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IMF 사태로 인해서 많은 회사가 문을 닫았고 실업자들이 거리에 넘쳐났다. 대우그룹 전체가 구조조정에 휘몰아쳤다.

이런 와중에서도 나는 이란으로 전보 발령을 받은 상태이니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필리핀에서 아무런 성과도 없이 들어왔으니 회사에 대하여 좀 미안한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이란에 가서는 마지막 3년을 최선을 다 하겠다는 각오를 하였다.

이란합작회사에 사장으로 부임할 분을 찾아뵈었다. ㈜대우에서 전보된 이 종성부사장이었다. 인사를 드렸는데 첫 인상이 좀 까탈스럽게 느껴졌다. 무언가 예감이 좋지 않다.

곧 그는 부친상을 당했는데 장례를 치를 때까지 나는 헌신적으로 도왔다. 앞으로 이란 현지에서 사장으로 모실 분이니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나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 이란 현지로 먼저 부임하면서도 나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분은 사장으로 취임했지만 그 신분이 대우 측의 주재원 신분으로 변경되어서 내가 갈 주재원 T/O가 없어졌다는 아리송한 이야기를 이정훈이사가 해주는 것이 아닌가?

이종성부사장은 처음부터 나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것이다. 내 나이가 너무 많았던 것이 흠이었다고 생각된다.

왕부사장에께 향후 나에게 어떤 일을 맡길 것인지 여쭈어봤지만 다른 나라 프로젝트에 자리를 만들어 보겠으니 기다리라고 하셨다. 직감으로는 임시변통으로 하는 말씀 같았다. 나는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되고 말았다.

16. IMF의 한파-명퇴의 길

1998년.1월 하순경 회사의 기구 축소와 인원 감축 사항의 범위가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큰 것을 알았다. 아래층 신한기 부장에게 확인해 보니 임원급에서 우선 정리가 있었는데 10여명이 사직 처리되었고, 30여명이 재교육 중이며, 또 10여명이 사직 후 계약 임시직으로 직위가 바뀌었다. 이 중에는 부산의 배이사도 포함되어 있다. 지금 용인 연수원에서 교육 중이라고 한다. 기업 인사 중에서 최고의 찬사를 받던 이사 승진이 지금은 오히려 원망스러운 것으로 바뀌고 말았다. IMF 시대에는 모던 가치기준을 하루아침에 이처럼 바꾸어 놓았다. 필리핀에서 같이 일 하였던 이이사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는 계약직으로 직위가 바뀌었고 향후 1년 후에는 다시 계약이 될지 모를 상황으로 전략하고 말았다. 일반 직원들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20%의 인력이 정상적인 조직에서 분리되어 판매회사로 내 몰리게 되었거나 TFT(Task Force Team)로 이동되었다.

참으로 엄청난 변화가 왔다. 나라의 경제가 파산 상태에 이르러 IMF으로부터 달러를 구걸하게 되었다. 우선 국가 부도의 위기 상황을 탈출하고자 온갖 굴욕적인 악 조건을 마다할 수 없이 달러를 꾸어오는 대신에 IMF의 굴레를 쓰게 되었다. 나라 전체로는 하루에도 직장을 잃는 사람의 수가 무려 4,0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여기저기 비명소리가 들린다. 어쩌다 나라꼴이 이 모양 이 지경까지 되었는가? 생각하면 한숨이요 후회의 눈물 밖에 없다.

아침 출근길에서 집 사람이 아파트 밑에까지 내려와 내가 차를 몰고 떠나도록 집에 들어가지 않고 지켜보아 주었다. IMF 한파를 이겨내도록 요즘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응원을 보낸다고 한다. 집 사람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요즘 나에게 각별히 애정을 쏟는다. 남편이 더 할 수 없이 미더운 모양이다.

며칠 전 은행에 들렸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금을 헌납하는 것을 보았다. 1월 말까지 모아진 금의 무게는 110여 톤이라고 한다. 이것을 즉시 수출하면 11억불의 외화가 들어온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아직도 금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동참하지 않고 있다 한다, 만일 이 금괴가 쏟아져 나올 경우 3천 톤이 넘는 금이 모아질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대단한 것이다. 무려 300억불이나 되니까 말이다. 이제 겨우 30분지1이 달성된 셈이다. 부자들이 나라 사랑을 더 많이 하면 얼마나 좋을까?.

2월 초엔 사무실 정리가 되었다. 많은 직원들이 오고 가고 해서 변화가 아주 많아졌다. 사무실 집기들이 이렇게 많이 옮겨가고 오고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이제 기다리게 된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별도 위치에 우선 앉을 자리가 마련되었다. 이제 또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인생살이에서 너무 순탄하여도 재미가 없을 터, 기다리면서 마음 여유로 주위를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이 생각은 그래도 이란으로 나갈 것이란 기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나 곧 닥친 감원이라는 휘오리 바람을 어떻게 피해 갈 수가 있을까? 감원 소식이 들려올 때 마다 나이가 제일 많은 나 같은 사람이 우선 대상이 될 것이 뻔하다. 처음에는 저으기 당혹스럽기도 하였지만 이제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 벌써 자포자기를 한 것인가? 지금 감원 실업 사태는 국가적 현상이다. 내가, 그리고 내 회사가 무사하기를 어찌 바라겠는가?

전종배 전무님 방으로 들리는 일이 잦아졌다. 대구상고 선배이시니 허물없이 찾아 뵐 수 있는 분이다. 나의 현 상황을 잘 듣고는 자동차를 수리할 수 있는 기술을 십분 이용하여 경정비 업을 시작해 보라고 권하셨다. 월급쟁이로써는 기껏해야 3년이니 정년퇴직 때까지 3년을 다 채우고 나갈 생각을 말고 미리 자립할 방도를 찾는 것이 훨씬 유리할 것이라고 하였다. 정년 후에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이라면 지금 시작하는 것이 오히려 좋을 듯하다는 것이다. 사업이란 어려울 때 시작해서 성공으로 이끌어야 진정 잘 하는 사업이지 호황일 때 덤벙대다가 몽땅 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 회사가 어려워 감원을 해야 하는 판에 맘 조리는 것 보다 스스로 자기 길을 찾아가는 게 떳떳하지 않겠는가? 때로는 생각을 반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하였다. 사실 월급 장이라는 것은 종이 한 장에 울고 웃는 불쌍한 인생이라는 것이다. 허무하기도 한 존재라는 것이다. 월급이 아무리 많아도 항상 모자라게 마련이고. 사업이 잘되어 바쁘면 바쁘다고 일에 내 몰리고 또 여의치 못해 어려우면 온갖 비상수단을 강구하느라 일에 또한 내 몰리게 되니 편할 날 없는 게 월급쟁이 신세라는 것이다.

말인 즉 옳다. 하여간 따뜻이 충고해 주는 분이 이런 싯점에서 계시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5월 하순 이정훈 이사로부터 명예 퇴직 권고를 받았다. 이 분은 나와 같이 입사한 동기생이다. 동기생에게 명퇴를 권할 수 밖에 없는 심정이 어떠했을까? 공과 사는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명퇴를 신청하면 7개월분의 급료를 추가 지급한다는 것이며, 만일 명퇴를 내지 않을 경우는 재택근무 발령을 내며 년 말에 가서 해고 예고 통지를 한 후 일정 법정 통고 기간이 경과하면 그대로 해고를 하겠다는 것이 회사의 방침이라고 설명하였다. 명예 퇴직에 관한 회사 지침에는 어디까지나 회망자에 한해서 회사에서 실시할 수 있게 되어 있지만 이쯤 되면 이것은 사직 권고나 마찬가지이다. 강제적이다. 현 경제 위기 상황에서 회사의 조치는 이해 가능하나 막상 당하고 보니 기분이 영 좋지 않다. 그러나 어제 신문에 보도되고 각 방송 매체도 탔다. 식구들이 알게 되었고 나는 그냥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현안 사항들을 정리도 하고 퇴직금도 대충 계산도 해 보고 향후 생활 대책도 세워보고 일은 막다른 길에 달려감을 어찌하는 수 없었다. 받아 든 명예 퇴직원 양식에 몇 자 적어 넣으면 30년 회사 생활은 끝이 나는구나 생각하니 참 한심하였다. 그러나 어찌하랴. 누구나 이런 길로 가야 하는 것을.

1998년. 5월 30일 나는 미련 없이 사표서를 내 던지고 만 것이다. 1968년 12월 1일 입사한 것이 바로 어제 일 같은데 이제 아련한 추억 속으로 간직하게 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나 보고 무능하다고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표를 내니 만사 속이 후련한 느낌이 든다. 당장 생활 대책이 궁색한 것이 마음을 짓누르기는 하지만 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당장은 퇴직금으로 금융 소득 월 120만 원 정도뿐이다. 지금 현재 실 수령액 기준으로 볼 때 반 밖에 되질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수입을 보충할 방도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좀 쉬면서 찾아보면 분명히 할 만한 일이 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보충하면 되니까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집 식구들에게 미리 얘기를 하였다. 식구들은 한결같이 이제 좀 쉬라고들 한다. 그 동안 너무 애만 썼으니 이제 어디 여행이라도 좀 다녀오라고 성화다. 아내가 나 보고 그 동안 고생 많았다고 하였고 아이들이 한결같이 담담한 표정들이었다. 셋째 계수는 제 갈 길은 스스로 하겠으니 걱정말라고 하였고, 넷째 선희는 공부를 마치면 역시 제 앞길은 제가 닦겠다고 하였다. 막내 소영이는 아무 말은 없으나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마음일 게다. 이렇게 해서 30년 지켜온 생활 패턴을 이제 바꾸게 되는 것이다. 나는 식구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을 하였다.

"아직도 나와 네 엄마가 건강하고 너희들 또한 건강해서 재앙이 없으니 큰 복으로 생각한다. 아직도 선희와 소영이 공부에 우선 돈이 들고 또 저축도 해야 너희들 시집 날 때 보태 쓸 것이지만 잘 절약해서 생활하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빠도 놀지 않고 무엇이라도 일할 생각을 갖고 있으니 절대 너희들도 기죽지 말고 각자 할 일을 열심히 해 다오."

이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부디 용기를 잃지 말자고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다짐을 한다. 이어서 나는 알릴만한 사람들에게 나의 사직 사실을 알렸다. 김봉석 사장에게도 알렸고 박삼도랑 김춘길, 등 친구에게 알렸다. 그리고 필리핀 이성수 이사에게도 알렸다.

새삼 이들이 고마운 것이다. 물론 회사의 위 분들의 고마움은 말할 것도 없고 동료와 부하 직원들 모두 고마운 감을 느낀다. 생각하면 나 혼자 잘나서 오늘까지 근무하게 된 것은 정말 아니다. 나는 이만큼 대 기업에서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안온하게 직장 생활을 영위한 것이다. 내가 대 기업에서 큰 대우를 받으면서 근무한 이면에 다른 중소기업에서나 같은 회사 내에서라도 혹 회생을 당한 자가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제로 섬(Zero Sum) 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이익을 내가 혹시 뺏은 일은 없는 지는 한 번쯤은 생각하고 반성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때까지 살아온 것은 내 자신과 가족을 위한 것이었으니 남은 생은 좀 더 남을 위해서 일하는 방법이 없을까? 이제 퇴직하게 되면 무엇이던지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일을 하였으면 좋겠다. 법림사 주지 스님에게 찾아가서 종단을 위하고 중생을 위한 일을 시켜달라고 할까? 원당 법당엘 찾아가서 김원수 법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리자. 올 현충일엔 국립묘지를 찾아가서 금강경독송회 회원들과 재회해 보자. 무엇인가 부처님께 복 짓는 일로 시작하는 것이면 뜻이 깊을 것이다.

91년 판매로 밀려났을 때 파주 임시 법당에 기거하면서 매일 금강경 7독을 하고 올라오는 마음 바치며, 100일 기도 발원으로 재기를 다지지 않았던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독송회와 인연을 맺게 해 준 정재영씨에게 참으로 고마운 마음 한량 없다. 그 때 난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이다. 절 양식이며, 연탄이며, 전기세, 전화세 등 많은 절 살림을 축낸 것이다. 무엇보다도 김재웅 법사님의 지도와 나에게 용기를 주시던 여러 독송회 신도 분들의 성원을 잊을 수 없다. 그 곳을 바탕으로 하여 나는 재기를 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그 도움을 갚아야 할 차례가 온 것이라 생각된다.

6월 1일에는 퇴직 절차를 밟는 사내 서류 작성에 하루 일과를 다 보냈다. 회사를 떠남에 있어서 해당 부서에 출입증, 신분증, 서류, 피복, 공구, 도서, 기술 자료, 의료 보험 카드, 집기 등 반납할 것은 반납하고 각종 신협 사우회 소비 조합 등에 걸려 있을지 모를 각종 정산금 확인을 하느라 회사 구석 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정리하는 것이 쾌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렸다. 과연 회사가 크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나는 30년을 하루 같이 드나들었던 정든 회사를 떠났다. 마지막으로 내 소지품을 챙기고 나오던 날 이수열 부장이 직원들을 모아 송별연을 베풀어 주었다. 직원들 일동이 만들어 준 기념페를 받기도 하였다. 나는 감격했지만 끝내 울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수열 부장에게 내가 그 동안 양복 옷깃에 착용하고 오던 대우 마크를 물려주었다. 이 마크는 판매에 나가서 1등을 한 달의 상으로 받은 금뱃지이다. 내게는 더 소용이 없는 물건이 되었음에 이를 이수열 부장에게 주면서

"나 대신 세계를 누비면서 열심히 뛰어 주게"

하고 마지막 작별을 하였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