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문학의 시초로 꼽히는 하버트 조지 웰스의 판타지 소설 '타임머신'이 세상에 나온 게 1895년이다. 그로부터 122년이 지난 지금까지 타임슬립(시간여행의 일종이나 타임머신 등을 이용한 의도적인 케이스와는 구분됨)은 여전히 대중문화 콘텐츠에 있어 매력적인 소재로 꼽힌다. 영화 '빽 투 더 퓨처'는 1편에서 과거로 돌아가 본의 아니게 부모의 만남을 방해하는 통에 한바탕 소동을 펼치는 과정을 그렸고, '시간여행자의 아내'는 의지와 무관하게 돌발적으로 맞이하는 시간여행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이처럼 적당한 변주를 통해 다채로운 에피소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타임슬립은 포기할 수 없는 소재다. 최근에는 KBS 2TV 주말극 '고백부부'가 타임슬립을 흥미롭게 풀어내 눈길을 끈다. SBS '사임당 빛의 일기'부터 tvN '시카고 타자기' '내일 그대와' 등 올해 방영된 타임슬립 소재 드라마들의 부진을 뒤로하고 매력적인 설정을 보여줘 흥미를 자아낸다. 10월 초 6%대를 넘나들며 인기를 끌었던 tvN '명불허전'에 이어 타임슬립 소재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선례를 남기고 있다.
◆'고백부부', 소소한 판타지 충족 공감대 형성
드라마 '고백부부'는 서로에게 소홀해져 위기를 맞은 부부가 대학시절로 돌아가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장나라가 결혼 후 육아와 살림살이에 지쳐 남편에 대한 애정까지 식어버린 주부 마진주 역을 맡았다. 예쁜 외모에 똑똑하고 명석한 대학생으로 촉망받는 인재였지만 전업주부가 돼 빛나던 젊은 시절의 자신감을 잃어버린 채 힘들어한다. 손호준은 가정을 꾸려나가느라 자존심까지 버리고 살아가는 제약회사 영업사원 최반도를 연기한다. 장나라에게 첫눈에 반해 행복한 가정을 꿈꾸며 결혼했지만 쥐꼬리만한 월급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영혼까지 팔고 집 안에서도 아내에게 무시당하며 한숨을 쉰다. 이처럼 드라마는 결혼한 부부가 흔히 겪을 수 있는 상황을 묘사한 뒤 두 사람이 과거로 돌아가 20대를 다시 살아가는 과정으로 빠르게 넘어가 캐릭터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쌓인 지혜와 수완, 기억까지 간직한 채 20대 시절로 돌아가면 좋겠다는 '흔한 상상'을 가시적으로 표현해 수요층의 호기심을 충족시킨다.
흔히 타임슬립 소재의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가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바꾸는 설정을 주로 택하곤 하는데 '고백부부'도 유사 소재 콘텐츠가 택한 방향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전개를 보여준다. 다만, 기존작들에 비해 좀 더 소소하고 현실적인 내용을 다뤄 대중의 진입 장벽을 낮추고 공감대를 형성하며 차별점을 확실히 만들어둔다. '빽 투 더 퓨처'의 현란한 액션과 날아다니는 타임머신 따위는 없다. '터널'처럼 시간여행이 이뤄지게 해주는 매개체나 계기도 특별히 지정해두지 않았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갑자기 20대로 돌아간 주인공들이 '인생 리셋'의 기회를 잡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젊음을 만끽하는 모습을 통해 화면을 통해서나마 '흔한 상상'을 실현해보게 하는, 간접적 만족감을 제공할 뿐이다.
◆캐스팅 효과 제대로, 이해 가능한 갈등구조
캐스팅이나 갈등구조를 만들어내는 솜씨도 그럴싸하다.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20대처럼 귀여운 외모를 자랑하는 장나라와 대중 호감도 높은 미남형 배우 손호준의 조합이 은근한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낸다. 특히 장나라는 본인의 실제 나이를 극복하고 20대 역할을 어색하지 않게 소화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결혼이란 현실 세계에서 고민하는 여자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끌기에 적합하다. 지능적인 캐스팅이다.
'예능드라마'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시트콤처럼 유쾌하고 코믹한 전개 역시 이 드라마가 가진 특장점이다. 여기에 20대로 돌아간 남녀 주인공이 각기 다른 이성을 만나 펼치는 로맨스가 더해진다. 이 로맨스는 두 주인공의 재결합 여부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 긴장감을 형성시키는 효과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과거로 돌아가 그때 그 사람을 만났다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라는 기혼자들의 판타지를 충족시킨다는 차원에서 꽤 자극적이다. 그리고 그 자극성은 한번 이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의 결과에 대한 호기심을 건드려 TV 앞에서 떠나지 못하게 한다. 금'토요일 심야 11시대에 방송해 5%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올리고 있는데 앞으로 인물 간의 갈등이 심화하면서 더 좋은 기록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고백남녀'의 시간여행 설정 중 특히 돋보이는 건, 이 드라마가 과거로 돌아간 남녀의 '즐거운 20대 다시 살기'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정도 수준이었다면 굳이 칭찬을 하지도 않았을 텐데, 이 드라마는 경험 많은 중년이 20대로 되돌아간다고 해서 그 시절을 뜻대로 풀어내는 게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시키며 보는 이들로 하여금 무릎을 치게 한다.
다시 태어나면 절대로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남녀 주인공은 그동안 쌓인 정이 있어 서로 쉽게 놓지 못한다. 후회로 가득 찬 결혼생활을 뒤로하고 과거로 돌아가 미래까지 바꿀 기회를 잡았지만 사랑스러운 아이의 부재 때문에 매일같이 가슴이 찢어진다. 이혼 과정에서 양육권을 두고 벌어지는 흔한 다툼의 수준이 아니다. 20대로 되돌아가 결혼 자체가 무효가 되면서 낳아 기르던 아이의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는 설정이다. 20대로 돌아간 것까진 좋은데 자식이 세상에서 없어졌다는 사실은 돌연 코끝을 찡하게 하고 은근히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한다. 또 하나 극 중 주인공들은 30대 후반까지 인생을 살다가 젊은 시절로 되돌아간 만큼 분명히 또래들보다 성숙하고 모든 일에 능숙한 면을 보여주긴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수가 없는 게 아니고 원하는 만큼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지도 못한다.
◆타임슬립 소재, 활용 여하에 따라 승패 엇갈려
이처럼 '고백부부'는 타임슬립이란 소재를 활용하되 대중의 판타지와 욕망을 직접적으로 건드리는 현실적 접근을 택해 콘텐츠 간 경쟁력을 높였다. 코미디를 전면에 내세우며 보는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범위에서 갈등구조를 만들어 시청자들을 끌어당긴다. 어차피 타임슬립이란 소재 자체가 가지는 한계가 뚜렷해 이론적으로 시청자들을 이해시키려 하다 보면 오히려 오류가 발생해 위험해진다. 이럴 때는 차라리 뻔뻔하게 극 중 시간 이동을 빠르게 보여주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캐릭터를 정교하게 다듬어 시청자들로 하여금 '저게 말이 되냐'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게 현명하다. 뭐가 됐든 대중문화 콘텐츠는 재미가 있으면 모두 용서된다. 미치도록 웃기는 영화가 설령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해도 평론가들로부터 최하점을 받지 않는 이유, 실컷 웃고 난 평론가들도 양심상 낮은 점수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고백부부'는 남녀 주인공이 서로에게 가졌던 오해를 풀어가며 한층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여줄 것으로 보인다. 이 전개 과정만 자연스럽다면 상업적으로 꽤 긍정적인 기획이었다고 평가받을 듯하다.
이 드라마는 네이버의 19금 웹툰 '한 번 더 해요'를 원작 삼아 기획됐지만, 원작의 설정만 빌려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원작 웹툰의 경우 과도한 베드신 설정 등으로 완성도가 무너지는 상태라 좋은 평가를 주긴 어렵다.
올 초만 해도 '사임당 빛의 일기' '내일 그대와' '시카고 타자기' 등의 드라마들이 줄줄이 망해나가면서 타임슬립이란 소재 자체에 대한 식상함이 부각되곤 했다. 그런데 사실 만드는 이들의 능력 여하에 달린 문제지 소재 자체가 물린다고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최근 타임슬립 소재를 차용해 성공한 드라마 '터널'과 '명불허전', 그리고 지금 방영 중인 '고백부부'를 보면 이해가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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