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손수레를 끌던 남자

9월의 어스름이 골목 어귀에 발을 들여놓고 있을 때, 한 남자가 손수레를 끌며 내 뒤를 따라와 곧 내 자리를 넘겨받았다. 가지를 담았던 종이박스 2개가 비틀거리는 남자의 몸짓에 따라 손수레에서 흔들거렸다. 간이 의자와 빨간 소쿠리 8개도 실려 있었다. 그 박스에는 '금오산 가지'라고 적힌 글자가 또렷했다.

박스에 그려진 가지 2개도 흔들렸다. 어디에선가 하루 종일 소쿠리에 가지를 담아 팔았나 보다. 술 한두 잔 기울인 탓인지 손수레 끄는 몸이 자꾸만 휘청거린다. 남은 가지가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오늘 팔기로 한 양은 다 처리한 모양이다.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데, 시큼한 술 냄새가 넘쳐 나왔다. 웬일인지 그 남자의 손수레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나였다. 상자에 담긴 가지를 다 팔아 기분 좋아 마셨거나, 밑지고 팔아 남는 게 없어 속상해서 마셨거나 둘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가 살고 싶어 사나, 그만둘 수 없어 살지." 남자의 혀 말린 그 소리가 징을 울리듯 가슴을 울렸다. "그랬었구나, 힘든 하루를 말하는 거구나"라고 생각하자 갑자기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10여 분을 동행하다 넓은 길이 나타났고, 횡단보도가 보이자 남자도 그 길 앞에 섰다. 거기서부터 남자와 난 반대방향으로 길을 갔다.

어둠 속으로 점점이 사라져가는 손수레 남자를 뒤돌아보면서, 그가 집에 도착했을 때를 떠올렸다. 아내는 단지 술을 마시고 왔다는 이유 하나로 바가지를 긁고 말 것이다. 하루 종일 땡볕에 그을리며 가지를 판 수고는 아랑곳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오늘 장사해서 번 돈 다 내놓아라," 아내는 술 먹고 온 돈까지 아까워 할지도 모른다. 그 심정 이해가 되면서도 그 남자 편을 들고 싶은 건 왜일까.

맞벌이 시대가 아닌 30여 년 전에는 한 남자가 통째로 가정을 돌봐야 했다. 그래서인지 직장의 스트레스를 한 잔의 술로 푸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지나치면 몰라도 애교로 봐 주며, 가장의 어깨를 짐작하곤 했었다.

"누가 살고 싶어 사나, 그만둘 수 없어 살지." 그 남자의 힘든 삶이 그 말 속에 다 녹아 있었다. '그만 죽겠다'는 말보다 얼마나 거룩한 말로 들리는지 곱씹어 봤다. 삶을 무의미하게 던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살아내겠다는 의지가 깃든 말로 들렸다. 그 마음을 술 한 잔 빌려 표현한 것이리라.

어둠이 짙게 깔려 있는 골목길을 바라봤다. 가지 장수 남자도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희망을 품고 장사를 하지 않을까.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큰소리치는 가장이 되고 싶지 않았을까. 그 남자가 가버린 쪽을 돌아보니 가로등이 막 눈을 떠, 보름달보다 환하게 손수레 위에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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