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일광의 에세이 산책] 땡감나무

김일광 동화작가
김일광 동화작가

포항 호미곶 내 작업실 앞에는 나이가 지긋한 감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사한 첫날, 마주 선 늙은 감나무는 왠지 기분을 좋게 하였다. 마음씨 좋은 이웃처럼 푸근한 느낌을 주었고, 슬며시 가을에 대한 달콤한 기대감도 갖게 하였다.

이듬해 봄이 되자 감나무는 일찌감치 연두색 순을 틔우더니 노란 꽃을 피웠다. 과연 감은 어떤 모습일까? 내 생각은 벌써 가을날 빨간 감에 가 있었다. 그런데 봄이 짙어지고 감이 달리면서 뭔가 조짐이 좋지 않아 보였다. 감이 굵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단감 모습과도 영 거리가 멀었다. 그야말로 쓸모없는, 돌감에 가까운 땡감이었다. 그래도 그늘은 좋겠거니 생각했는데 여름이 되었지만 그늘에 대한 시원함도 누릴 수가 없었다. 감나무는 자리 하나 펼 수도 없는 돌담 짬에 있었다. 돌덩이들이 거칠어서 발 디디기도 힘들었다. 더구나 숲 모기까지 잉잉대는 바람에 들어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감나무에 대한 즐거운 기대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오히려 가을이 되자 바람이 불 때마다 잎을 떨어뜨렸다. 잎은 또 왜 그리 많은지 근처 텃밭까지 어지럽게 만들었다. 밉다고 하면 미운 짓을 찾아가며 한다는 말처럼 가지가 꺾어지고 나뭇잎이 떨어지면 고스란히 돌덩이 사이로 들어가서 그 일대는 늘 지저분했다. 청소를 해도 울퉁불퉁, 삐죽삐죽한 돌밭을 깨끗하게 치울 수는 없었다.

감나무를 다스리고, 매실나무를 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봄에 활짝 피어나는 꽃도 좋지만 꽃 진 자리에 달릴 매실은 작업실을 더욱 밝게 할 것 같았다. 내친김에 담벼락을 따라 유실수를 여러 그루 심었다. 호두, 석류, 대추, 블루베리 등 종류별로 줄을 맞추어서 심었다. 그런데 호미곶은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 손꼽을 정도였다. 바람에 적응하지 못한 이 나무들은 샛바람이라도 불고 나면 꽃은 고사하고 잎까지 새카맣게 말라버렸다. 다시 싹을 틔우고, 잎을 만들고, 열매 맺는 시늉만 하다가 가을을 맞았다. 그런데 땡감나무는 신기하게도 그 바람을 견디며 감을 지켜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올려다보면서 쓸데없는 일에 용쓰고 있는 것만 같아서 핀잔을 주곤 했다. 땡감나무는 나의 핀잔과 무시를 뚫고 작고 야문 열매들을 조롱조롱 매달고는 발갛게 익혔다.

겨울이 오고 작업실 창에 고드름이 달릴 무렵이었다. 감나무는 기다렸다는 듯이 활짝 가슴을 열고 손님을 불렀다. 개구쟁이 참새, 목소리가 예쁜 박새, 깃털이 어여쁜 딱새, 수다쟁이 직박구리가 수시로 들락거리며 감을 먹었다. 감나무는 아무도 가져가지 못하도록 못난 감을 매달았다가 고이고이 익혀서는 배고픈 겨울새들을 위하여 마음껏 내어주고 있었다. 감나무는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쓸모의 기준을 나에게 맞추어 왔던 내 생각이 부끄러워졌다.

땡감나무! 세상에는 쓸모없이 존재하는 생명이 하나도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주었다.

김일광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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