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낳은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성 중심의 철학과 결별을 선언했다. 말보다는 몸을, 몸보다는 정신을 강조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일반인은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들로 가득 찬 철학책이 아닌 시적 언어와 일상어의 나열로 시민들이 구독 가능한 책들을 출간해 철학의 난해함을 타파하는 데 힘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서의 근대철학을 느끼고 상상하는 방식으로 전환시키는 데 일조했다.
어떻게 보면 니체는 철학자가 아니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니체의 세계관에 추파를 던졌고, 적당한 수사로 눈을 홀리는 이방인으로 취급하기 일쑤였다. 그런 그가 스물네 살에 대학교수로 임용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동시에 크리스천 집안에서 자란 아이가 신은 없다고 외친 사건은 더욱 부조리하기도 하다. 왜 그는 평생을 반대하는 삶을 살았을까?
나는 이 문제의 해답을 그가 창조한 인간, 차라투스트라에서 발견한다. 신의 죽음을 외치고 또 하나의 신으로 명명한 인간이 그러하다. 니체의 말을 바라보자.
"차라투스트라의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무도 내게 물어보지 않았다. 차라투스트라는 도덕이라는 오류를 최초로 고안해낸 인간이다. 그렇기에 그는 도덕의 오류를 최초로 인지한 인간임이 분명하다. 성실성을 통한 도덕의 자기 극복, 이것이 차라투스트라의 이름의 의미다."
그가 바라본 인간상은 보이지 않는 절대자에게 의존하는 객체가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를 희랍인처럼 용기를 갖고 세계와 마주할 줄 아는 인간을 의미했다. 그것은 곧 세상의 중심에서 자기 존재를 선언하는 주체정신을 말하는 것이었다. 무질서와 질서가 교차하는 현재의 굴레에서 실존의 방향을 자아에서 출발할 때에 비로소 완전한 무언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신념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도덕이라는 미명으로 자기 합리화에 물들어 있을 수도 있다. 1984를 쓴 조지 오웰의 메시지도 이것과 일치한다. 국가가 만든 시스템은 정의와 도덕을 부르짖지만 개인의 정신은 말살당하고 자유는 굴종당하고 마는 체제. 오웰도 인간의 조건은 자유에 있다고 말한다. 시대의 인간으로 남기 위해 제시한 니체와 오웰의 대안은 부조리의 중심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아포리즘으로 남아 있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사회는 리더를 원한다. 대중을 더 나은 질서로 살아가게 만드는 누군가를 갈구한다. 늘 기대하며 새로운 인간을 찾지만, 가혹하게도 현실은 늘 실망과 우려를 낳아 희망의 줄기를 사그라지게 만든다. 그럼에도 우리는 현실에 당당히 맞서줄 이를 기다리고 있다. 이왕이면 전장의 최전선에 서 줄 이를 원한다. 만약, 니체가 21세기에 살고 있다면 그는 어떤 선택을 주장할까? 아마도 한결같을 것 같다. "과거의 정신을 재현하는 이가 아니라 현재의 시대정신을 갖는 인간이 필요하다."
나 또한 광기 가득한 시인이자 지식인의 외침을 온몸으로 새겨듣길 원한다. 보다 인간다운 인간이 도착할 지점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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