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식량/ 루스 디프리스 지음/ 정서진 옮김/ 눌와 펴냄
16세기 유럽에 처음 들어온 감자는 높은 열량과 편리한 저장성으로 매력적인 작물로 자리 잡았다. 유럽인들의 키가 커지고, 출산율이 높아진 것도 당시 주식이었던 감자 덕분이었다. 심기만 하면 싹이 나고 주렁주렁 열리는 감자는 종자를 살 필요가 없었다. 가난한 아일랜드 소작농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작물이 감자였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감자도 완벽하진 못했다. 유전적 동일성, 좁은 경작 간격 탓에 감자에 역병이 돌았고 농민은 희생양이 됐다. 썩어 들어가는 밭을 갈아엎었다. 새로 심을 감자조차 남아나지 않자 사람이 하나둘 죽어나갔다. 1845년 아일랜드는 인구의 8분의 1인 100만 명이 감자 역병으로 목숨을 잃었고, 100만 명이 영국과 신대륙으로 떠났다.
더 이상 대기근은 없었다. 곧 역병에 강한 품종이 들어오고, 농가를 떠난 이들이 늘어나 경작지가 넓어지면서였다. 적응이다.
◆톱니바퀴, 도끼, 그리고 중심축의 회전
인류의 여정도 이와 같다. 아일랜드의 대기근은 성장-위기-전환점이라는 주기를 돌고 도는 인류 문명의 축소판이다. 환경지리학자 루스 디프리스는 채집인에서 농부로, 다시 도시인으로 진화하는 인류 문명의 원천을 식량에서 찾는다. 그의 책 '문명과 식량'은 먹고살려고 환경에 저항하고 적응해 온 인류가 어떻게 번성했는지를 추적한다. 저자에 따르면 문명은 굶주림에서 벗어나려는 투쟁의 과정이며, 식량은 문명의 원동력이다.
그의 주장은 새롭지 않다. 먹고살려는 인류의 몸부림이 '문화를 번영케 하고 기술을 발달시켰다' '식량의 증산이 인구를 늘렸다' '식량 확보를 위한 경쟁과 혁신이 환경을 변화시키고 시'공간적 거리를 좁혔다' 등의 주장은 인류 문명과 세계사를 다루는 교양서의 단골 레퍼토리다. 그러나 그는 '톱니바퀴-도끼-중심축'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식상한 주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해낸다.
기본적으로는 이렇다. 배고픈 사람이 끼니를 구한다. 식용작물을 재배하거나, 양분을 퍼트린다. 자연을 변형해 식량을 늘린다. 식량이 늘어나면 인구(개체 수)가 늘어난다. 성장의 톱니바퀴가 회전한다. 하지만 급증한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난관에 봉착한다. 기아라는 도끼(위기)다. 얼마 후 자연 산물을 활용하는 새 해결책을 내놓는다. 톱니바퀴는 다시 돌아간다. 다시 식량이 늘고 인구가 는다. 한쪽으로만 돌아가는 톱니바퀴와 성장을 막는 도끼, 그리고 새로운 회전을 추진하는 중심축(전환점)에 의해 톱니바퀴는 다시 돌아간다. 이렇게 반복된 주기는 인류 역사의 궤적과 일치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다른 생물과 구분되는 특성을 더한다. 유전자에 의존해 진화하는 다른 생물과 달리, 인간에게는 '밈'(meme'개체의 기억저장소에 유전자처럼 저장돼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문화의 구성 요소)이 있어서 음식물을 선택하고, 시설을 만들고, 비료를 추출하는 혁신을 꾀한다고 주장한다. 자연과의 사투에서 식량을 얻는 방식은 종 다양성, 지구의 순환 시스템을 건드리지 않는 방향으로 변형해왔다. 20세기 전까지.
◆성장과 위기, 그리고 전환의 반복
저자는 식량을 확보하려는 인류의 노력을 여러 각도에서 확인한다. 도구를 사용하고 불을 발견한 인간은 자연을 변형해 인구를 부양하기 시작했다. 우연히 발견한 밀 두 포기는 농경의 시발점이 됐다. 씨앗과 곡물을 저장했고, 재배종을 개량하고 가축을 사육하기에 이르렀다. 길들인 가축이 노동을 충당하면서 같은 면적에서 힘을 덜 들이고도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게 됐다. 가축의 힘을 빌리는 방식은 고대 강 문명에서 수 세기가 흘러서야 유럽 대륙에 전해졌다. 곡물 생산량 증가는 인구의 폭발적 증가를 이끌었다. 식량공급량을 초과한 인구는 '도끼'가 됐다. 힘들고 고된 소작농의 사망이 급증하고 유례없는 추위와 대홍수, 기아와 전염병이 유럽을 강타했다. 끔찍한 시기 성장의 중심축이 되었던 것은 다시 가축을 이용한 노동과 거름, 질소를 고정한 토끼풀이었다. 배설물이 쉬는 땅의 지력을 높여 더 많은 농작물을 만들어 낸 것, 이른바 '농업혁명'이었다. 잉여식량은 도시 인구의 증가로 이어졌고, 화석연료가 동력자원이 되면서 경제의 축은 농업에서 산업으로 이동했다. 도시가 커진 것도 이때다. 그러나 분뇨 수거인이 인분과 정육점 오물을 모아 농촌으로 되가져간 덕분에 질소와 인이 이동했고, 비옥한 땅을 유지할 수 있었다. 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식량은 화석연료와 질소비료의 몫이었다. 그러니 수질오염, 대기 중 온실가스 농도 상승은 필연적인 결과다. 기계와 비료, 연료의 공급 증가는 대규모 단일재배로 수확량을 극대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러나 단일재배는 또 도끼가 됐다. 병해에 취약한 단일재배의 위험에서 인류를 구한 것은 기적의 살충제 DDT였다. 새로운 '허수아비'의 등장으로 수확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기근의 걱정을 덜어낸 인류는 끈질긴 잡종교배와 품종개량을 통해 녹색혁명의 기적을 낳았다.
◆도시인의 위기
2007년 세계의 도시 인구는 농촌 인구를 넘어섰다. 생산자보다 소비자가 많아지게 된 것이다. 식량이 어디에서 나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잊어버리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 같았던 식량자원의 속도는 더뎌졌다. 인구의 급증은 안정세를 보이고 있지만, 지구의 순환 시스템에는 빨간불이 켜졌다. 가축분뇨와 비료'거름이 만들어낸 온실가스는 전체 온실가스의 4분의 1 이상이다. 칼로리당 7~15배에 달하는 에너지를 들여 한 끼를 해결하는 상황이다. 인류가 원하는 기름진 식단에 희생된 건 소'돼지'닭뿐만이 아니다. 가축을 키우고자 열대림을 훼손하고 개간하며 수만 년에 걸쳐 완성된 생태계는 교란됐다. 어느 때보다도 식량이 풍부하고, 인류는 번성했다. 하지만 선진국에서는 냉장고에서 고기가 썩어 버려지고, 개발도상국에서는 냉장시설이 없어서 고기가 썩는다. 또 다른 도끼가 등장할 날이 머지않았다. 책은 뒷부분에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언급한다. 장밋빛 전망이다. 도끼가 내려쳐지기 전에 도시인이 된 농부가 내놓을 수 있는 답은 무엇일까.
364쪽, 1만6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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