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벚꽃이다. 요즘 날씨는 하루 중에 겨울, 봄, 여름이 뒤엉킨 듯 감을 잡을 수 없다. 거기에 미세먼지까지. 그런데 용케도 벚나무는 자신의 시간을 알아채고 꽃을 피웠다.
늦은 시각, 초인종이 울렸다. 이웃 마을 친한 부부가 문간에 서 있었다. 시골에서 가져온 국산 참기름을 나누려고 꽃길 산책 삼아 나왔단다. 한참을 걸어왔을 텐데 참기름만 건네주고 돌아섰다. 너무 늦었다며 쭈뼛대는 부부를 우리는 억지로 불러들였다.
밤 10시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찻잔을 앞에 놓고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아내가 내 옆구리를 찔렀다. 그 부인의 이야기에는 늘 향기가 난다고 했다. 나는 뜨악한 눈으로 아내와 앞에 앉은 부부를 번갈아 보았다. 아내는 다시 가만히 들어보라며 '향기'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듣고 있던 그 부인이 당치도 않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다가 이야기는 남편들 성격으로 옮겨갔다. 우리 둘은 용띠 동갑이었다. 급기야 우리 두 사람 때문에 모든 용띠들이 고지식하고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말끝에 그 부인이 처음 꺼낸다며 지나간 이야기 하나를 털어놓았다.
용띠인 그 집 남편은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큰 집을 짓고 싶어 했단다. 회사에서 퇴직금 중간정산을 계기로 아내와 아이들을 여인숙으로 옮기고 새집을 지었다. 아내를 위하여 주방도 크게 만들고 바닥은 대리석으로 깔았다. 두 아이의 방도 각각 독립 공간을 만드는 등, 그야말로 우뚝하게 솟은 이층집을 완성하였다. 그런데 아내는 큰 집을 관리하는 게 너무나 벅찼다. 이곳저곳 신경 쓰다 보면 하루가 지나갔다. 번듯한 집에서 삶의 여유를 즐기는 게 아니라 큰 집에 치이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밤에 도둑까지 들어왔다. 번듯한 겉모양이 도둑을 불러들인 것이었다. 이를 겪은 아내는 그만 그 집이 싫어졌다. 집에 있으면 불안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불안의 정도가 점점 심해져서 결국 병을 얻고 말았다. 아내를 잃을 것만 같았던 남편은 큰 집의 미련을 버리고 작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도망치듯 마련한 작은 집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단다. 아내가 안정을 찾기도 했지만 살다 보니 작은 집이 실용적임을 제대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여유를 얻은 부부는 지금껏 어려운 이들을 돕고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다. 용띠 남편은 아내에게 단잠을 되찾아준 작은 집과 그때 그 승용차를 26년째 바꾸지 않고 있단다. 모두들 큰 집으로, 신형 고급 승용차로 몰려가는 세상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특별하게 들렸다. 듣다 보니 아내 말처럼 그들의 이야기에서는 향기가 났다.
그들 삶의 모습이 산뜻한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큰 집에 대한 욕구를 내려놓는 순간 그들에게 찾아온 안락이 그들의 삶을 향기롭게 만들고 있었다. 벚꽃을 닮은 이야기꽃, 웃음꽃 속에서 훌쩍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다.
김일광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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