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청송 3'1만세운동은 달랐다. 안동'예천은 고종 황제 국상에 참여한 유림에 의해 만세운동이 추진됐고, 의성'영덕'김천은 평양신학에서 유학하던 신학생들이 서울에서 시위를 목격하고 귀향하면서부터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하지만 청송은 자생적인 성격이 강했다. 평소 독립 염원을 품고 있던 인사들이 주변 지역의 만세운동 소식에 자발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이다. 항일의병의 정신이 가슴속 깊게 박힌 청송지역 주민들은 나라를 위해서라면 목숨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청송은 1919년 3월 25일 진보면 진안리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처음 일어난 후 다음 날 현서면 구산리 화목장터에서 이틀간 만세운동이 계속됐다. 또한 그해 4월 초 지금의 청송읍에서 두세 차례 만세운동을 하면서 일제에 항거를 이어갔다.
청송의 만세운동은 의병정신과 그 맥을 함께하고 있었지만, 아직 그 가치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다. 후손들이 안타까움에 개별적으로 자료를 찾고 역사를 되짚어보기도 했지만, 세월과 함께 한계에 다다른 지 오래다. 최근 청송군이 청송 3'1만세운동에 대한 정확한 역사 고증을 위해 용역 발주를 하면서 다시 실낱같은 불씨가 피워지기 시작했다.
화목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펼치다 일본 경찰에 쫓겨 중국과 시베리아, 일본 등지로 망명했던 독립운동가이자 농촌계몽운동가 고 박치환(1878~1968)의 손자 박효일 화목교회 장로는 가장 크게 기뻐했다.
박 장로는 "청송 3'1만세운동이 내년 100주년을 맞기 전에 깊이 있는 연구가 이뤄져 더 많은 유공자를 발견했으면 한다"며 "이름 없이 순국한 수많은 선조와 그 후손들에게 이 연구가 뜻깊고 상당한 의미로 다가갈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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