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팔거역에서 강북소방서까지 이어지는 상가 골목. '이태원길'이라는 표지판이 방문객을 맞는다. 이름만 보면 서울 용산구의 그 이태원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이 골목은 그와 아무 관련이 없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소설가 '이태원'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태원 작가는 대구 북구 읍내동에서 태어났다. 당시에는 경북 칠곡으로 불리던 곳이다. 그의 가족은 4·19 혁명 당시 가산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부터 그는 객지에서 힘겨운 삶을 버텨야 했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감정으로 남았다.
그는 "집안의 맏아들로서 책무를 다하고, 민족의 한 구성원으로서도 제 몫을 하고 싶었다.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며, 소설 속에서라도 그런 삶을 그리고자 했다고 밝혔다. 그렇게 그는 고향 대구의 현실을 작품으로 남기기로 마음먹는다.
◆고향 대구의 현실을 작품으로
시, 시나리오, 소설을 가리지 않고 26차례나 등단에 도전한 끝에 1970년 동아일보 창간 5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에서 '객사'로 등단한다. 작품의 배경은 당연히 그의 고향이었다. 칠곡향교를 중심으로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냈고, 등장인물들은 작가가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품은 채 세상의 부조리에 맞섰다.
이후에도 그는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1978년 장편 '개국'을 펴냈고, 동명의 KBS 대하드라마로 제작되며 큰 인기를 얻었다. 고향 영남의 젖줄의 이름을 딴 '낙동강'을 본지에 연재하기도 했다. 조선 말기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도 고향을 지키려는 유림과 백성의 절절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는 등단 직후부터 '주류' 문단과는 거리가 있었다. 중앙 문단과 교류 없이 갑작스럽게 이름을 알린 탓이다. 그렇게 그는 늘 한 발짝 비켜선 자리에서, 조용히 작품을 이어갔다.
그래서일까 2009년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대구 시민들조차 '이태원'하면 소설가보다 서울 지명을 먼저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이제라도 그를 기억하려는 움직임이 조금씩 시작됐다. '이태원길'이 그 출발점이다. 길 위의 동천육교에는 그의 작품 세계가 녹아 있다. 계단에 그려진 은행나무와 물결은 소설 '객사'의 주요 배경을 형상화한 것이다.
육교를 따라 도착한 광장 주변 상업건물은 책장 모양으로 꾸며졌고, 골목 곳곳에는 은행나무 조형물과 '객사' 속 인물을 형상화한 조각들이 자리 잡고 있다. 광장 중앙의 이태원 문학관에서는 그의 삶과 작품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다. 생전에 사용하던 지포라이터와 나침반, 볼펜까지 전시돼 있다.
◆이태원 문학관,작품을 만나
생전 그는 '객사'의 작가의 말을 통해 변화해버린 고향에 대한 씁쓸함을 남겼다. "고향은 상전벽해란 말이 사실이라는 듯 몰라보게 달라져 있다. 옛날의 산과 들, 사람과 숨결이 흔적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사라져 가고 있다. 오죽했으면 칠곡이란 지명도 없어졌을까".
그의 말처럼 대구는 끊임없이 변해왔고, 많은 기억도 덩달아 지워졌다. 그렇기에 지금 이 골목에서 이어지고 있는 '이태원'을 향한 시도는 더욱 의미가 깊다.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한 작가의 이름을 또렷히 새겨두려 한다.
아쉽게도, 이 골목의 주인공은 여전히 '소설가 이태원'이 아니라 상업시설이다. 프랜차이즈 식당 사이에서 그의 흔적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방문객들 역시 이태원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간다.
프랜차이즈 간판 사이에 가려져 있지만, 이 골목에는 분명 한 소설가의 삶과 시간이 묻어있다. 고향을 떠나서도 끝내 고향을 쓰려 했던 작가. 누구보다 대구다운 이야기를 써내려간, 이태원. 우리가 잊고 있던 이름을 골목은 조용히 붙잡고 있다. 지나치지 말고 한 번쯤은 멈춰서 읽어봐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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