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1 정신 대구경북의 '얼'] <1>남녀노소 대동단결한 만세운동

국권회복에 힘 모았듯이 '제2의 3·1운동' 펼치자

안동 웅부공원에서 열린
청도군 3.1동지회 창립 기념 촬영 사진.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안동 웅부공원에서 열린 '3.1 만세운동 재현'에서 시민들이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하고 있다. 안동시 제공

내년이면 '3·1운동' 100주년을 맞는다. 3·1운동은 1910년 8월 29일 경술년에 나라를 강제로 빼앗기고, 1945년 8월 15일 나라를 되찾기까지의 항일투쟁과 독립운동 과정에서 가장 치열했던 운동이었다. 매일신문은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국혼회복과 민족 정통성을 되찾기 위해 모든 백성들이 스스로 떨쳐 일어났던 거대한 시민사회 운동이었던 3·1운동의 현대적 의미를 되새긴다. 특히, 한국 독립운동사의 중심지였던 대구경북의 3·1운동사를 되짚어 보고, 지금까지 숨겨진 종교계와 3·1운동 참여자들을 발굴하고 조명해 대구경북의 정체성과 얼을 22차례에 걸쳐 되살린다.

◆1910년 8월 29일 한민족 나라 잃은 백성되다

1910년 8월 22일 오후 1시.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興福軒)에서 어전회의가 열렸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였다. 이날 회의는 일제 데라우치 통감이 사전에 건네준 '한일병합조약안'을 체결하는 데 필요한 '전권위임에 관한 조서'에 순종의 재가를 받는 자리였다.

이날 순종과 고종의 거처인 창덕궁·경운궁을 비롯해 서울 안팎에는 2천600여 명의 무장한 일본군과 헌병들이 배치됐다. 이처럼 계엄과 다름없는 살벌한 상황 아래에서 순종은 전권위임장에 서명했다.

최고 통치자가 아무런 저항도 해보지 않은 채 나라를 통째로 일본에 넘겨주는 굴욕적인 순간이었다. 이완용은 순종에게서 받아낸 전권위임장으로 데라우치 통감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8월 26일 조약을 공포할 예정이었으나 그 다음날이 순종의 황제즉위일이란 점을 고려해 29일 발표했다.

1910년 8월 29일. 순종은 이날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제에 넘겨주게 됐다고 발표했다. 순종은 황제 즉위 사흘째 되던 날, 조선 500년 사직을 이어갈 막중한 책임을 자신의 '부덕'을 탓하며 일제에 넘겨주었다. 순종은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됐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도저히 만회할 시간이 없고 방책을 찾을 수 없음을 탄식했다.

순종은 이날 종묘사직을 이렇게 일본제국주의 손아귀에 넘겨주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민족은 나라 잃은 백성으로 전락해 버렸다. 한반도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됐다.

◆국치 이후 국내외서 새로운 항일투쟁 모습 펼쳐져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일제에 맞선 새로운 투쟁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1909년까지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을 펼치면서 저항했지만, 끝내 나라를 빼앗기고 말자 항일투쟁이 새로운 모습으로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보수적 유림을 중심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일제의 침략과 통치가 한국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세계에 알린 '자정순국'(自靖殉國)이라는 극단적인 투쟁으로 표현됐다.

계몽운동을 펼치던 인사들은 나라 밖으로 망명해 독립군을 기르는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독립군 기지에 인력과 자금을 공급하기 위해 '대한 광복회'라는 국내 지원 조직도 만들어졌다.

나라 밖에서 틀을 잡은 독립운동가들은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국제적으로 상황 변화가 나타나야 그 틈을 이용해 우리가 독립을 성취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다리던 국제 정세 변화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나타나자, 독립운동 양상은 발 빠르게 변했다. 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를 독립운동가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한 좋은 기회로 판단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미 국제 사회에 '한국이 일본 통치에 의해 발전하고 있고, 한국 민중도 일본 통치에 감복하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일본의 주장보다 더 큰 목소리가 필요했다. 그것이 하나로 뭉쳐진 민족 전체가 하나 되어 부르짖는 함성이었다.

나라 밖 곳곳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세력들은 지역마다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려고 시도했다. 특히, 일본 유학생들은 강화회의에 앞서 1월 말에 조국의 독립 선언 준비를 끝냈다. 이들은 2월 8일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2·8독립운동'으로 조국의 독립을 부르짖었다.

이러한 국외 활동은 독립을 열망하는 민족의 의사를 큰 함성으로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같은 열망이 바로 3·1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3·1운동은 세계 만국에 한국이 독립국임을 선언하면서 반드시 독립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었다.

◆3·1운동, 한국 독립운동사의 분수령으로 평가

3·1운동은 '한국 독립운동의 분수령'으로 평가된다. 3·1운동은 한국사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으킨 집단항쟁이었다.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대부분 '민중'들이였다.

이 때문에 3·1운동은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떠오른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들은 황제와 지배층이 지켜내지 못한 나라를 자신들의 힘으로 되찾으려 나섰다. 이는 역사적 주인의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의식의 전환점이었다.

3·1운동은 일제의 침략이 한민족의 뜻과 상반되는 것이고, 강제병합이 무효라는 사실을 천명했다. 일제가 국제사회에서 합의된 병합이라고 떠들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발표한 것이다.

또, 한국이 이미 독립국이라는 사실을 천명했다. 독립선언서 첫 머리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비록 대한제국을 일제가 멸망시켰지만, 이날 '독립국'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던 것이다.

3·1운동은 정부 수립을 촉구했다. '독립국'을 선언했으므로, 다음으로는 그 '독립국'을 유지하고 운영할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였다. 민족 전체가 일어나 독립만세를 부르고,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했다는 사실은 자주독립국을 유지할 정부조직체를 꾸려 나가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정부 수립이야말로 민족의 뜻으로 제시한 과제였다.

3·1운동은 나라의 주인이 더 이상 황제가 아니라, 국민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민중들의 인식 속에 대한제국은 종결된 것이다. 사실상 3·1운동은 역사를 경술국치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논리에 종지부를 찍은 거대한 사건이었다.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의 선두에선 3·1운동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로고
청도군 3.1동지회 창립 기념 촬영 사진.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

3·1운동은 세계 제국주의 열강에 맞서 일어난 식민지 해방운동의 선두에 섰다. 3·1운동 직후에 일어난 독립운동은 4월 인도 마하트마 간디 주도의 비폭력·비협조운동, 5월 중국에서 터진 5·4운동, 그 해 여름에 일어난 베트남 독립운동, 필리핀 마닐라 대학생과 이집트 카이로 대학생들의 독립운동 등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으로 치달으면서 터져 나온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의 선두에 바로 3·1운동이 있었다. 제국주의가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면서 세계를 집어삼키던 그 시기에 3·1운동이 이를 비판하고 막아서는 흐름의 선두에 있었다.

3·1운동은 제국주의 침략 물결에 맞서는 사건이었다. 비록 제국주의 열강 가운데 승전국이 중심을 이루어 판을 폈던 파리강화회의였지만, 여기에 식민지 해방문제를 다루도록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강윤정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은 "3·1운동의 결실이 한국사에서 최초로 근대국가, 민주공화제를 달성해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며 "전 민족이 참가해 비폭력투쟁으로 침략 세력에게 저항하고, 세계에 알려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도 높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자료도움 :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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