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주향의 이야기와 치유의 철학]당신의 저녁은 안녕하신가요?

이주향 수원대 교수

이주향 수원대 교수
이주향 수원대 교수

마음과 몸, 무엇이 우선일까요? 영지주의자들은 몸은 마음의 감옥이라고 봤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이해했던 맥락이 있을 텐데, 그 맥락을 놓친 채 몸은 마음의 감옥이라는 그 구절만 놓고 보면 아예 몸을 부정하는 것 같지요? 실제로 서구역사에서 그 문장은 기독교와 묘하게 결합하면서 죄책감을 낳았습니다. 그것은 서구의 중세가 몸의 부정, 욕망의 부정으로 점철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들어서면서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몸의 해방, 욕망의 해방이 화두가 되는 건 당연합니다. 신은 죽었다는 선언과 함께 몸의 해방이 누구보다도 절절했던 철학자가 바로 니체였습니다.

"대지가 내 껍질을 삼키듯이/ 내 안의 뱀은 대지를 갈망한다./ 벌써 나는 돌과 풀 사이를 기어/굶주림에 몸을 비틀며 나아간다./ 내가 항상 먹어온 것을 먹기 위해/ 너 뱀의 음식이여, 너 대지여!"<즐거운 지식>

뱀은 내 안의 욕망입니다. 뱀은 에덴의 질서에 따르지 않고 자기의 질서를 만듭니다. 뱀은 관념을 살지 않고 대지에 살며 편견을 먹지 않고 흙을, 대지를 먹습니다. 그 대지를 갈망하는 뱀은 '나'를 '나'답게 하는 내 안의 생명력입니다.

삽화 권수정
삽화 권수정

생각해 보면 마음이 없는 몸도, 몸이 없는 마음도 모두 허깨비 아니겠습니까? 오르세 미술관에서 밀레의 그림들을 보면서 지금까지 밀레의 그림들이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를 알아버린 것 같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마음이 담긴 몸의 힘이었습니다. 그 당시 밀레보다 더 화사하게, 더 예쁘게, 때로는 극적이게까지 그린 그림들이 많은데 소박한 밀레의 그림들이 그렇게 시선을 끄는 건 무엇보다도 거기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밀레의 그림에는 대지를 긍정하며 자기 노동으로 정직하게 살아가는 건강한 몸이, 마음이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그림 '만종'을 보십시오. 노을이 지는 저녁, 땀 흘려 일한 들판에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부부! 그들은 조용히 종소리를 듣고 있는 듯 하지요? 만종에 대해 밀레는 들에서 일하시다가도 종이 울리면 일손을 멈추고 기도를 드렸던 할머니를 추억하며 그린 그림이라 했습니다. 기도하는 할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란 밀레는 종소리를 듣는 자의 태도와 포즈를 알고 있었고 사랑하고 있었을 겁니다. 밭을 일구다가, 감자를 캐다가, 이삭을 줍다가 종소리에 홀려 마음을 모으는 그들의 기도가 허황된 것일 리 없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생에 대한 사랑입니다.

비록 그들이 거둔 것이 돈이나 명에나 권력이 되지 못한다 해도 그런 것이 없이도 문제되지 않는 삶이 있는 거지요? 생각해 보면 돈이 많아 돈 지키느라 사람도 잃고 인생도 잃은 사람들이 많지 않나요? 명예의 감옥의 갇히고 권력의 감미로움에 취해 자기를 내려놓지 못하고 아집덩어리가 되어 스스로 고립된 불안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밀레의 그림들을 한참 들여다보니 자연스레 물음이 생깁니다. 삶은 무엇으로 지켜지는가? 바로 자연 속에서의 노동이고, 그 노동을 감사한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노동으로 살아가는 세상은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까지.

그림 앞에서 나는 그림 속 부부처럼 손을 모아봅니다. 그리고 거두어들인 감자의 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 감자를 삶아 나눠먹을 그들의 저녁을 축복합니다. 돌아갈 집이 있어서, 함께 감자를 먹을 수 있어서, 함께 웃을 수 있고 울 수 있어서, 눈을 맞추고 손잡을 수 있어서 행복한 삶을 축복하는데 마치 내가 그 저녁의 주인공 같네요.

밀레의 노을은 돌아갈 집이 있는 자의 노을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저녁이 있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저녁의 종소리, 저녁의 노을, 저녁의 기도에 빠져 있다가 다시 저녁의 노을이 인상적인 한 작품을 만났습니다. 상처 입은 자의 저녁이 인상적인 모로의 작품,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사마리아인 이야기 아시지요?

길손이 강도를 만나 다 털리고 거의 죽게 된 채로 쓰러져 있었습니다. 마침 경건하다 일컬어지는 제사장이 길을 가다 그를 보았지만 못 본 척 지나쳐 가고, 존경받는 레위인도 그 사람을 지나쳐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천하다 손가락질 당하는 사마리아인이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을 내 "그 상처에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을 태워서,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었습니다.

누가복음의 이 이야기와 함께 언제나 듣게 되는 교훈이 있습니다. 착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면, 바로 '위선'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서 도망가는 위선적인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살지 말라는 이여기, 선한 사마리안인처럼 누군가를 도와야 한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는 종종 강박이 되기도 해서 도와주기 힘들거나 어쩐지 도와주기 싫은 상황에서 죄책감을 갖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바로 강도 만난 자와 그의 상처를 싸매고 있는 사마리아인을 형상화하고 있는 모로의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처음에는 황혼이 아름다워서, 다음에는 벌거벗은 길손의 몸과 제대로 걸친 사마리아인의 대비가 시선을 끌어서, 그리고는 황혼녘에 자기를 가누지도 못하고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이를 일으켜 세우는 사마리아인의 동작에 마음이 움직여서 그림 앞에 그대로 서있는데 신기하게도 익숙한 그 죄책감이 사라지는 거 있지요? 죄책감도, 부담감도 없이 작은 그림 속에 빨려들어 갑니다. 그림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의 관점을 바꿔, 내 안에서 아예 다른 이야기가 샘물처럼 솟아나고 있는 느낌입니다.

무엇보다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생각이 찾아옵니다. 상처 입은 채로 쓰러져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일어설 수 없었던 저 남자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제 몸도 가누지 못한 채 쓰러져 있는 남자에겐 자기 집을 찾아 돌아갈 힘이 없고, 돌아갈 힘이 없는 자에게 황혼은 절망입니다. 그런데 상처 입은 채로 쓰러져 있던 남자가 생각 보다 아름다운 겁니다.

절망이나 두려움 속에서 헤매고 있는 시간,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지요? 상처가, 독이, 그의 몸을 삼키고 그의 정신을 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 때는 레위인처럼, 제사장처럼 지위가 얼마나 높은 지, 사회가 그를얼마나 선망하며 존경받는 지, 하는 것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 때 필요한 것은 내 상처에 집중해줄 사마리아인입니다. 어쩌면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사마리아인은 '존중'이라는 무게도 내려놓은 내 속의 치유자인 것은 아닐까요? 내가 그의 손을 잡고 그이에게 내 자신을 온전히 맡겨야 몸과 마음이 회복되고, 회복된 몸과 마음으로 자기 집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돌아갈 집이 있고 감사하는 손이 있는 자에게 저녁은 휴식이고 평안이지만 돌아갈 집이 없는 자, 상처 입은 자에게 저녁은 두려움이고 고립이고 불안이고 방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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