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흥]메밀꽃 필 무렵, 들썩이는 봉평

메밀꽃밭은 대낮에도 흐붓해
평창효석문화제는 9일까지
소설 속 무대 상상은 자유

소금을 뿌려 놓은 듯한 봉평면 메밀 들녘에서 서울에서 여행 온 한 쌍의 부부가
효석문화제가 열리고 있는 봉평면 메밀밭 축제장에서 관광객들이 꽃밭 사잇길을 걷고 있다.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소금을 뿌려 놓은 듯한 봉평면 메밀 들녘에서 서울에서 여행 온 한 쌍의 부부가 "메밀 꽃 필무렵"소설 속 주인공 마냥 추억을 남기고 있다.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5살 아들 녀석은 축구장에 눈이 내렸다고 했고, 9살 아들 녀석은 팝콘을 쏟아놓은 것 같다고 했다.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광경이다. '엎질러진 소금', '소금을 뿌려놓은'이라는 관용어구와 어울려 회자된다. 80년이 넘었다. 1936년 발표된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한 토막이다. 세 아이를 둔 서른 살의 작가도 재기발랄한 아이들의 시선으로 본 것이었을까.

9월이면 어김없다. 메밀꽃밭은 열렸다. 메밀꽃은 어떤 표현이든 무릎을 탁 칠 정도로 적확하게 무리지어 피어나 있다. 누구나 문학도가 되고, 누구나 사진작가가 되고, 누구나 인생사진의 모델이 되게끔. 가산 이효석(1907~1942)의 표현은 '소금을 뿌린 듯'이었다.

흰색과 짙은 초록색의 배합은 수수하다. 그러나 탐스럽도록 화려하다. "달빛에 비쳐 보면 새하얀 것들이 도드라진다"는 주민들의 말을 100% 확신하고도 남음이다. 대낮의 메밀꽃밭도 흐붓하기 그지없다.

이효석 생가
효석문화제가 열리고 있는 봉평면 메밀밭 축제장에서 관광객들이 꽃밭 사잇길을 걷고 있다.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메밀꽃 필 무렵' 이효석을 되새기다

'평창효석문화제'라는 축제가 있다. 문학 작품 하나를 모티브로 축제까지 열다니. 산과 강과 계곡의 자연자원으로 부족해 더위와 추위로 축제를 만들어내는 전국 축제 관계자들이 입을 떡 벌릴 만하다.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초강력 콘텐츠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기도 했지만 메밀꽃밭이 잘 보이도록, 광활한 면적을 메밀꽃밭에 내어놓은 주민들의 노력이 커보였다.

이효석문학관을 찾은 문학도들이 작가의 작품과 일대기를 관람하고 있다.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이효석 생가

이곳은 주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1970년대 스스로 가산 이효석을 문화상품으로 만들었다고 자랑한다. 자랑할 만도 한 것이 이곳은 '메밀꽃 필 무렵' 덕분에 먹고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가산은 조선의 셰익스피어라 불려도 무리가 아니다. 36세로 운명하기까지 희곡, 소설, 산문 등 200편이 넘는 작품을 썼다. 1928년 단편 '도시와 유령'으로 등단한 이후 15년간 매년 14편 남짓 써낸 셈으로 어림잡아 한 달에 한 편 이상 썼다. 요즘처럼 노트북이 있어서 스르륵 쳐내는 시대도 아니었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항상 펜이 꽂혀 있었던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문학관 앞에는 소설가 이효석의 집필모습 동상이 있다..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이효석문학관을 찾은 문학도들이 작가의 작품과 일대기를 관람하고 있다.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그를 기리는 문학관은 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이 대거 찾는다. 특히 주민들이 힘모아 새겼다는 '메밀꽃 필 무렵'의 글자 하나하나, 총 5천자의 목판 앞에선 탄식이 터진다. 작가를 지망하는 학생들은 좋은 기운을 받으러 한 번씩은 그 앞에 선다고 한다.

문학관 전망대는 메밀밭 전체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허생원, 동이 등 온통 소설 속 인물의 이름을 딴 메밀 식당들도 한꺼번에 들어온다.

정작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자 이효석 문학관을 비롯해 이효석 콘텐츠로 가득찬 봉평면 창동리 일대는 가산의 출생지가 아니다. 실제 출생지는 인근의 진부면이다. 가산이 태어난 20세기 초입, 호랑이가 튀어나올 만큼 첩첩산중에 있던 동네였다. 그 무렵은 봉평면도 마찬가지였다.

이효석 문화마을에는
문학관 앞에는 소설가 이효석의 집필모습 동상이 있다..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소설 속 표현처럼 '흐붓한 달빛이 메밀꽃밭을 비추는' 풍경은 인공의 불빛 하나 없던 그 시절 애오라지 달빛만이 은은한 조명등처럼 메밀꽃밭 전체에 퍼져있는 광경이었으리라. 옅은 조명에 메밀꽃은 한층 하얗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문화제 기간 내에는 실제로 이런 모습을 보긴 어려울 것 같다. '평창효석문화제'는 9일까지 열리는데 이 기간은 달이 사위어가는 시기다. 오후 9시까지 연장 운영돼 고맙지만 달이 비추는 자연광 효과는 볼 수 없다.

혹여 달빛이 오롯이 빛나줄 시기를 기다려 9월 마지막 주 음력 8월 15일 추석 큰 보름달을 노린다면 꽃이 남아줄지가 관건이다. 문화제가 끝나고 나서도 메밀꽃밭은 사라지지 않지만 메밀꽃은 하순으로 접어들면 수가 많이 줄어있을 것이다. 가산이 그렇게도 농밀하게 묘사해낸 그 장면은 아닐 것이다. 권불오년(權不五年) 화무이순백(花無二旬白)이다.

효석문화마을에는 당나귀 조형물과 바람개비가 조성됐다.
이효석 문화마을에는 "메밀꽃 필 무렵" 작품무대의 하나인 물레방아가 지금도 쉼 없이 돌아가고 있어 소설의 분위기를 느끼게하고 있다.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물레방앗간, 허생원을 떠올리다

옅은 백색이든, 순백색이든 하얀색은 문학평론가들 사이에서 종종 에로티시즘의 연결고리로 해석된다. 뿌연 안개, 하얗게 퍼져있는 은하수(milky way)는 실제로도 몽환적 느낌이다. 소금을 뿌려놓은 듯한 메밀꽃밭도 예외는 아니다.

허생원에게 메밀꽃밭은 헤어진 연인에게 선물받은 음악 CD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연인과 함께 듣던 그 음악은 연인과 함께 했던 추억을 재생시켜준다. 그녀와 헤어졌음에도 '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만 듣고도 침을 흘리던 조건 반사처럼. 그것도 좋았던 기억들만.

소설가 김영하는 그의 산문집 '포스트잇'에서 이성에게 자신을 오래도록 기억하도록 하는 방법 중 하나로 음악 선물을 꼽았다. 파국으로 이어진 연인 관계였음에도 노래를 들을 때마다 연인과의 기억을 떠올린다는 것이었다. '선물처럼 들어와 성을 점령하는 트로이의 목마들'처럼.

봉평면에서 한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대관령 하늘목장에서 양떼들이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다.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효석문화마을에는 당나귀 조형물과 바람개비가 조성됐다.

허생원은 메밀꽃이 만개한 9월의 메밀꽃밭을 지날 때마다 그 때의 상황을 자연적으로 복기했을 거라 짐작한다. 단순히 메밀꽃 향뿐 아니라 달빛과 풀벌레소리까지 더해져 한 편의 오페라처럼 공연됐을 것이다. 이런 상상을 하며 물레방앗간에 설치된 얼굴 없는 남녀의 그림을 보고 있자니 허생원의 처지가 가련하기 짝이 없었다. 이곳저곳을 떠돌며 장사하는 장돌뱅이라면서 한 번쯤 찾아나서 보기라도 하지 그랬냐며.

물레방아는 작품 속 밀회 장면의 상상을 돋운다. 규칙적인 회전은 심장박동보다 빠르다. 물소리는 주변 모든 소음을 잡아먹으면서 스스로 가장 큰 소리를 낸다. 적당히 사실적으로 구성해둘 수밖에 없었음이 이해되고도 남았다. 너무 자세히 표현하기 껄끄러웠을 것이다.

얼핏 순애보처럼 보이는 허생원에 감정 이입을 자제하고 보니 이곳을 찾은 이들은 하나같이 단체거나 커플이다. 금슬이 좋아 보이는 부부와 연인들의 모습이 유별나게 많이 목격되는 것도 우연으로 보이지만은 않았다.

사진 찍기 좋은 곳을 찾아다니는 정찰 활동이 곳곳에서 이어진다. 유료로 운영되는 포토존 주변은 꽃밭 군데군데 빈 공간이 보인다. 대신 해바라기가 들러리선다. 옥수수도 심겼다. 자세히 보니 실제로 일궈먹는 밭이다. 조경용이 아니라 생존용이다. 자연스러운 모습이 정겹다.

봉평면에서 한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대관령 하늘목장에서 양떼들이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다.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이상하게 코를 자극하는 냄새가 그치지 않는다. 메밀꽃은 냄새가 얄궂기로 유명하다지만 분명 꽃내음은 아니다. 원래 메밀꽃 향이 이랬나 싶을 정도로 소똥 냄새가 잔잔하다. 풍경엔 시각만 아니라 바람과 공기도 조력자임을, 후각도 중요한 요소임을 새삼 느낀다.

그래도 메밀꽃이 한창인 것만은 확실하다. 벌떼가 먼저 안다. 쉴 새 없이 맴돌다 앉았다 오르내린다. 가을의 전령, 잠자리도 저공비행을 시작했다.

메밀꽃의 밀도가 높은 곳을 찾아 나선 이들은 물레방아 옆으로 난 길에 눈을 돌린다. '메밀꽃밭 촬영지 가는 길'이라는 플래카드가 크게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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