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영남지역 최초 여성교육 기관으로 출발한 신명여학교는 1919년 3월 8일 서문밖시장에서 열린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유일한 여학교다. 대구경북 독립만세운동의 주역들을 길러낸 이 학교는 1972년 개교 65주년을 맞이해 3·1운동에서 큰 역할을 했던 교사와 졸업생, 재학생 등을 기리기 위한 신명 3·1 기념탑을 세우기도 했다. 3·1운동 기념탑을 교정에 세운 학교는 신명고가 전국에서 최초였을 만큼 당시 만세운동을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있다.
1919년 3월 8일 서문밖시장을 메운 뜨거운 함성으로 그 시작을 알린 대구경북의 3·1운동은 대구 출신이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이갑성이 대구 기독교계 지도자였던 이만집 목사를 만나며 시작됐다. 당시 이갑성은 전국 곳곳에서 독립만세가 준비되고 있음을 알리며 이만집에게 대구에서의 만세운동을 설득했다.
이후 교회와 인근 학교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만세운동 소식은 신명여학교에도 전해졌다. 3월 4일 오전 대구고등보통학교 4학년 허범이 신명여학교 교사 이재인(32)을 만나 학생동원을 논의했고, 신명여학교 6회 졸업생 임봉선(23)과 이선애(23)가 앞장서서 전교생의 참여를 이끌었다. 학생들은 만세운동에 쓸 태극기를 급히 만들고 의복을 준비하며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만세운동이 약속된 8일 낮 대구 서문밖시장에는 개신교 지도부를 비롯해 계성학교 학생, 각 교회 성경학교 학생 등을 중심으로 1천여명이 모여들었다. 오후 2시쯤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합류를 신호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하늘을 찌르는 함성과 함께 만세 행렬이 시작됐다.

신명여학교 학생들도 일부는 운동의 시작 지점이었던 서문밖시장에서, 통학생들은 동산교 근처에서, 20여명의 기숙사생들은 약전골목에서 시민들과 합류하는 등 졸업생을 포함한 전교생 약 50여명이 아래 위 흰 옷에 수건을 허리에 멘 채로 목메어 만세를 외쳤다.
인근 주민이나 상인 등의 합류로 세를 불려가던 만세 인파는 대구경찰서(현 중부경찰서)와 만경관, 종로를 지난 후 옛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 부근) 앞에서 무장한 일본군경의 가혹한 진압과 마주하며 행진을 끝내야 했다. 기마헌병들은 신명여학교 학생들의 머리채를 잡아 채 내동댕이를 치는가 하면 쓰러진 위를 마구 짓밟고 지나갔고 특히 이선애, 임봉선 등은 군경과 정면으로 충돌해 얼굴과 전신이 피로 낭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신명여학교 학생 가운데 20여명이 현장에서 체포됐다. 2주 후 대다수 참가자들은 석방됐지만 만세시위 참여를 주도했던 이재인과 임봉선은 징역 1년형을, 이선애는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 같은 신명여학교의 만세운동은 국권 회복과 여권 신장을 목적으로 하는 대한애국부인회와 조선여자기독청년회의 활동을 통해 계승돼 광복의 밑거름이 됐다. 한준호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사는 "국가보훈처에서 훈장과 포상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1만4천329명인데 이 중 여성은 272명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 대구에서는 신명학교 전교생 50여명이 3.1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 부분"이라며 "앞으로 이들의 용기와 희생이 더 많이 발굴되고 조명받아야 할 것으로 본다"고 했다.
※참고자료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경북독립운동사
신명학교 100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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