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지었다 했지요?
천년을 훌쩍 넘기고도 여전히 매혹적인 석굴암의 부처님과 그 부처님이 만들어내는 신비하고도 아늑한 공간을 느끼고 나면 신라인이 어머니를, 아버지를 어떻게 느끼고 공양했는지 짐작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어머니는, 아버지는 삶의 중심이고 신성입니다.
사실 우리는 어머니에게서, 아버지에게서 유전자만 물려받은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그들에게서 삶의 태도와 습관, 그리고 정서까지도 물려받습니다. 당신은 누구를 닮았습니까, 혹은 누구를 닮았다는 얘기를 듣습니까? 어머니를 닮았다는 것이,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이 좋으신가요, 싫으신가요? 만약 양친 부모 중 누군가를 닮았다는 이야기가 부담스럽다면 우리는 우리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소화하지 못하는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거기서 얽힌 운명의 실타래를 풀어야 하는 과제가 있다는 걸 은밀히 알려주고 있기도 합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엄마를 둔 친구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어제 한 일은 커녕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지도 잊어버린 엄마 때문에 굉장히 놀랐답니다. 그렇게 똘똘했던 엄마에게서, 어려울 때 전적으로 아이를 키워주시고 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맞이해주던 엄마에게서, 늘 그렇게 계실 줄 알았던 엄마에게서 표정이 없어진 것을 보는 일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속이 끓고 우울한 날이 많아졌습니다.
주중에는 회사에 나가 정신없이 일하고 피곤해진 몸을 이끌고 피곤한 줄도 모른 채 주말마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일을 반복한 친구에게 한 사건이 생겼습니다. 톨게이트를 나오는데 차 안에 있어야 할 티켓이 없어진 것입니다. 요금 징수원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데 순간,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생각이 나지 않더랍니다. 잠시 당황했겠지요. 그것은 매 순간 기억을 놓치고 있는 엄마의 현재와 겹쳐져 더 당황스런 일이 됐습니다. 엄마의 치매가 자기의 미래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을 테니까요. 집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르게 정신 놓고 왔다는 친구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전화를 건 것입니다.
"걱정에 걱정을 보태 사태를 키울 필요 없어, 그건 피곤해서 순간, 번 아웃 된 거야. 그런 사건이 생긴 건 이제 엄마 걱정 놓고, 너를 돌보며 살라는 신의 계시 아닐까. 그 계시를 읽지 못하면 몸이 진짜 반란을 일으킨다!"
친구는 그 사건 이후 엄마의 치매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짊어지기 힘든 인생의 무게라 생각했을 때는 어떻게든 엄마를 바꿔보려고 엄마에게 순간순간 단호하게 굴었는데 그 후 그 다급함은 사라지고 엄마를 대하는 태도가 온화해진 것입니다.
매일 엄마와 통화하는 친구는 엄마를 모시고 사는 오빠를 통해 이미 엄마의 아침식사 내용을 듣고도 엄마에게 다시 묻는답니다. "엄마, 아침에 뭐 먹었어?" "안 먹었어!" "배고프겠다. 뭐가 먹고 싶어?" "시원하게 국수를 말아먹고 싶은데 모두들 나를 굶겨."
이제 그것이 확인을 해야 하는 사건이 아니라 그 시간을 즐기면 되는 놀이라는 것을 인지한 친구는 대응이 유연해졌답니다. "그래? 엄마. 그러면 주말에 나랑 맛있는 국수집 가서 국수 먹자."
그렇게 말하고 나면 이상하게도 국수가 먹고 싶어진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치매에 대해 겪어서는 안 되는 두려운 불운의 사건이 아니라 겪을 수도 있는 삶의 일이라 여기니 엄마의 치매가 부끄럽지 않게 됐습니다. 그래서 주말이 되면 어릴 적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엄마 손 잡고 식당에도 가고 목욕탕에도 갔답니다. 그 친구는 그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 3년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꼭 있어야 할 인생의 '최소한'이 화두인 소설, 전경린의 '최소한의 사랑'에는 치매 걸린 새엄마가 나옵니다. 예의 바르게, 그러나 심술궂게 치매환자를 다루는 요양원 원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말합니다. "환자가 하는 부탁, 마음 쓰지 마세요. 본인도 곧 잊어버리니까요."
그러나 주인공은 새엄마가 "부탁이 있다"며 한 어떤 당부에서 새엄마의, 지키고 싶었으나 지키지 못한 소중한 '최소한'을 보며 꼭, 들어주고자 합니다. 치매 환자라고 무시하면 안 되는 거지요? 어쩌면 모른다고 단정하는 것이 우리의 무지, 우리의 폭력일지 모릅니다. 우리의 존재이유는 그 무지, 그 폭력을 거두어지며 드러나는 것인지도.
혹 '아버지와 함께 한 마지막 날들'이라는 책 보셨습니까?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아버지가 주인공입니다. 이탈리아 사진작가 필립 툴레다노는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잃고 나서야 비로소 소중한 존재였음에 절실해지는 존재들 중에, 어머니, 아버지가 있지요?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에야 깨달았다. 내가 어머니 생전에 당신의 영향을 부정하고 반항하며 보냈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어머니를 잃어버리고 나서 그의 소원은 혼자된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는 것이 됐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한 삶은 의무가 아니라 '나'를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단기 기억상실증인 아버지는 아내의 장례식을 치르고도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잊고 자꾸 아내의 행방을 묻습니다. 처음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엄마 돌아가셨잖아요."를 힘주어 강조했지만 아버지와 함께 지내면서 아버지의 눈높이를 맞출 줄 알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파리에 갔어요. 거기 병상에 계시는 외삼촌을 돌보고 있어요"
그러면서 깊이 느끼게 됐습니다. 진실은 사실과 다르다는 사실을. 사실이 표면적이라면 진실은 심층적입니다. 눈높이를 맞추는 일 없이 사실은 진실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진실에 도달하고 나서야 사실에 온기가 생깁니다.
아버지에게는 늘 파리에 계신 어머니지만 그렇다면 아버지가 끝까지 모른 것일까요? 툴레다노가 쓰고 있습니다. "그럴 때가 있다. 아버지가 대화 도중 갑자기 말씀을 멈추고는 한숨을 푹 쉬며 눈을 감으시는 것이다. 그렇구나. 아버지는 아시는구나. 엄마에 대하여, 모든 것에 대하여."
더는 어떻게 할 수 없어 차라리 잊어버리게 된 것이 있지 않나요? 차라리 잊어버렸던 그것이 어느 날 어느 한 순간에 찾아와,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그리움의 그림을 그린 경험, 없으신지요? 그때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말이 없이도 소통되는 그 그림 속에 들어앉아 있는 '나'에 대해 감사할 밖에요. 그 감사야 말로 생에 대한 감사, 진실한 감사입니다.
수원대 교수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