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국가기밀의 정체

박병선 논설위원
박병선 논설위원

구소련 체제를 빗댄 유머다. 한 청년이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있는 레닌의 묘지 앞에서 "레닌은 멍청이다!"고 외쳤다. 이 청년은 도합 1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죄목은 소란죄 3년, 국가 기밀 누설죄 12년이었다.

실제로 소련에서는 1940년대 후반 국가 기밀 누설죄가 시행되면서 수많은 사람이 수용소에 끌려갔다. 지구의 곡물 생산, 전염병 통계, 공장의 생산품, 민간 비행장의 위치, 도시의 수송로, 수용소 죄수의 이름 등은 국가 기밀에 속했고, 징역 15년형에 처해졌다.<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군도>

한국 기자의 목격담이다. 1989년 2월, 소련의 프라우다 신문은 지면 오른쪽 상단에 깨알 같은 글씨로 '모스크바 영하 15도'라고 적었다. "다른 도시의 일기예보는 왜 없느냐?"고 묻자, 러시아의 국영통신사 직원은 "국가 기밀"이라고 답했다. 일기예보조차 보도 못 하던 소련은 2년 뒤 무너졌다.<최맹호, 다시 보는 역사의 현장>

한국이라고 다를까. 1970, 80년대 툭하면 간첩단 사건이 터졌고, 북괴를 위해 국가 기밀을 수집했다고 발표됐다. 안기부가 적용한 국가 기밀 누설죄는 국민 누구나 아는 상식이었다. 신문에 난 것은 당연히 국가 기밀이고 '경부고속도로는 4차선이고, 자장면은 싸고 맛있다'도 국가 기밀이었다. 국민 모두가 걸어 다니는 국가 기밀 덩어리였다.<한홍구, 역사와 책임>

국가 기밀을 앞세우는 나라는 건강하지 못하다. 국민에게 뭔가 감추고 싶어 하면 권력은 병들기 시작했다고 보면 옳다.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의 '업무추진비' 공방과 관련해 정부여당이 '국가 기밀'을 내세우는 걸 보니 참으로 보기 흉하다. 자신들의 야당 시절은 전혀 돌아보지 않는 것 같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이 "이자카야, 와인바에 갔다고 폭로한 게 무슨 국가 기밀 탈취냐"고 하자,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청와대 식자재 공급업체, 정상회담 식재료 구입업체 등 국가 운영에 치명타가 될 자료가 많다"고 반격했다. 옛날 군대에서의 농담이 생각난다. "병사 식단 3급, 부사관 식단 2급, 장교 식단은 1급 비밀이다. 적이 바꿔치기해 독극물을 투입할지 모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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