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고
법적 제도화 하는 게 정치의 영역
애매모호한 남북관계 관련 법률
정치권 머리 맞대고 빨리 정비를
문재인 대통령이 비준한 평양선언, 남북군사합의서가 발효되었다. 문 대통령은 올해 안에 남북관계를 불가역적으로 진전시키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자유한국당의 반발을 무릅쓰고 서두른 이유로 보인다. 한국당은 헌법재판소에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면서 헌재가 또다시 짐을 떠안게 되었다. 바람직하지 않은 정치의 사법화가 현재도 진행 중이다. 남북관계는 근본적으로 정치의 영역이다. 특히 지금은 남북이 전인미답의 길을 가는 중이다. 생각지 못했던 문제들이 수시로 불거지고 있다. 정치권이 정치력과 협상력을 발휘해야 할 상황이다.
법적인 판단은 다르다. 법에 따라 흑백의 결론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창의적인 상상력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처분 신청은 인용 혹은 기각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정치적 영역으로서 사법 판단에 적합하지 않다고 결론 내기도 어렵다. 평양선언 등의 위헌 여부를 다투는 게 아닌 가처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치적 문제를 법으로 재단하는 것은 정치의 영역을 스스로 축소하는 행태이다. 자신들의 숙제를 대신해 달라는 게으름의 소산이기도 하다. 기왕 법의 영역으로 들어왔다면 사실 정치권이 할 일은 많다. 애매모호한 남북관계 관련 법률을 정비하는 게 그것이다. 남북관계가 진전될수록 문제는 수시로 불거질 것이다. 그때마다 법리 논쟁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선 남북한 간 합의는 헌법상 조약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 문 대통령의 과거 발언이나 일부 학자들의 경우 북한을 국가로 인정할 수 있고, 남북합의를 조약으로 인정할 수도 있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북한의 국가성 등이 합의되지 않은 상황에서 위헌논쟁만 불거질 가능성이 크다. 본질은 제쳐둔 채 논의가 산으로 갈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남북관계는 '국가 간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정의하고 있다. 대법원과 헌재의 기존 견해대로이다. 북한이 국가인지 논란을 벌일 이유가 없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평양선언 등은 조약이 아니기 때문에 국회 동의가 필요없다고 밝혔다. 헌법상 조약이 아닌 남북관계 발전법에 따른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 또다시 불거진다. 남북관계 발전법에 따라 비준, 공포한 남북합의서가 어떤 규범적 효력을 가지는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헌법에 따른 조약이어야 대한민국 법률로서의 효력을 갖는다.
반면 남북합의서는 조약이 아니기 때문에 그 같은 효력을 갖지 못한다. 남북관계 발전법에도 남북합의서의 법률적 효력에 대한 언급이 없다. '남북합의서는 남한과 북한 사이에 한하여 적용한다'는 '효력범위' 규정만 있다. 구속력을 갖는 법률인지 명령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남북한 관계처럼 애매모호한 상태로 남겨진 것이다. 천정배 의원의 지적처럼 평양선언 비준은 '법적 효력은 없는 정치적 선언'인 셈이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개척하는 것은 정치의 영역이다. 법적인 제도화는 그 길을 포장하고 탄탄대로로 만들어 누구나 갈 수 있도록 만드는 후속작업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정치가 할 일이다. 법적인 제도 정비에 나서지 않는 것은 정치권의 직무유기인 셈이다. 청와대와 정부 여당은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법적인 정비에 함께 나서도록 야당 설득에 공을 들여야 한다. 야당 역시 집권할 정당이라면 비난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변화하는 남북관계를 감당할 정당이 아니라는 모습으로 굳어질 수 있다.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여와 야가 머리를 맞대고 고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비난과 다툼 대신 문제를 풀기 위한 고민 말이다. 오늘 청와대 여야정 협의체 모임에 기대를 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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