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대구문학관에는 장혁주가 없다

화가 이인성이 표지를 그린 장혁주 소설집
화가 이인성이 표지를 그린 장혁주 소설집 '인왕동시대'(1939. 대구문학관 소재)"

장혁주는 대구 출신 문인이지만 대구에서는 잊혀진 작가이다. 북성로에 위치한 대구 문학관에 가보면 이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대구 신시가지였던 북성로의 역사적 기억과 함께 현진건, 이상화, 이장희 그리고 장혁주의 연애대상으로 심심찮게 거론된 백신애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대문학을 이끈 작가들이 대구문학관 한 쪽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장혁주는 자료실 유리장안에 소설집 한 권만 덩그러니 전시되고 있을 뿐 전시공간 어디에서도 이름을 발견할 수 없다. 대구고등보통학교(現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조선인 최초로 일본의 권위 있는 문예현상모집에 당선되었으며 많은 문학적 성과를 낸 이 작가를 대구는 기억에서 완전하게 지워낸 것이다.

현대의 대구가 장혁주를 기억에서 지워내기 훨씬 이전, 장혁주 스스로 대구를 혹은 조선을 자신의 삶 속에서 지워내고 있었다. 그는 조선인 장혁주보다는 일본인 노구치 미노루(野口稔)로서 살기를 원했던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동안에는 있는 힘껏 조선인의 열등함을 비판, 공격했다. 해방 후에도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고, 일본에 남아 일본인으로 귀화 했으며 일본어로만 글을 썼다. 그렇다고 그가 조선의 현실에 눈을 감았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어 소설 '아귀도'(1932)나 '쫓겨가는 사람들'(1932)은 일제 침탈로 인해 핍박당한 조선 민중의 현실을 당시 어떤 소설보다도 정확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이육사는 장혁주의 눈빛을 두고 일본 군국주의에 정면대항한 일본 아나키즘 대부 오스기 사카에(大杉榮)의 눈빛을 닮았다고까지 표현했을 정도이다.

삶이란 참으로 다양한 변수들로 이뤄진 것이어서 그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기생과 구한말 관료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비극적 출생의 이력이 그로 하여금 조선을 등지게 했을 지도 모른다. 혹은 근대 일본과 근대 일본문학을 향한 그의 과잉된 동경이 조선인으로서의 자신을 부인하도록 했을 수도 있다. 어쨌건 그는 조선인으로서의 흔적을 열심히 지워가면서 조선에서 살았던 날보다 더 많은 날을 일본에서 살았다. 그리고 94세, 일본인 노구치 미노루로 일본 땅에서 죽음을 맞았다. 87세에 걸프전을 취재하여 소설을 썼을 때 이번에는 일본어도 조선어도 아닌 영어로 표기했다는 것을 보면 조선어나 조선은 이미 그의 삶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최근 학회에 참석했다가 장혁주를 연구하려고 하는 이십 대 후반의 젊은 연구자를 만났다. 왜 하필 장혁주냐고 그에게 물었더니 답은 간단했다. "장혁주가 지향했던 곳은 조선도, 일본도 아니었던 듯하다. 그는 자신이 꿈꾼 새로운 이상적 세계를 찾아 헤맸다. 그 곳이 어디였는지, 무엇을 그렇게 찾아 헤매었던 것인지 궁금하다." 이 젊은 연구자는 친일과 반일의 차갑고 딱딱한 잣대로만 한 시대와 인간을 재단해내었던 내 또래, 혹은 내 선배 연구자들이 범했던 오류에서 벗어나 있었다. 친일을 비판하기에 앞서 그런 기형적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의 심리를 혼란스러운 역사 속에서 이해하려고 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 사회도 인간과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깊어지고 있는 것이다.

경북북부연구원 연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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