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11월 22일. 우리 부대는 회천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때 부대의 목표는 중국과의 경계선인 초산까지 먼저 도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회천에서 초산까지는 일주일 정도 걸린다고 했다. 그러나 회천까지 가는 도중에 중공군의 공격이 있었다. 후방 여러 산골짜기에서 나팔소리, 북소리가 어우러져 어두운 장막을 깼다. 요란한 소리를 잠재우며 따발총소리가 따따따따, 따따따따 가까이 들리기 시작했다. 우리부대는 진격하지 못하고 묘향산 남단으로 이동하여 중공군과 마주하게 되었다.
▶ 소대장 전사
소대장이 박격포를 지휘하다가 적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소대장 대신 선임상사가 전투를 지휘했지만 밤새도록 불안한 총알이 빗발쳤다. 먼동이 트자 아군과 적군이 구별되었다. 밤새 몇 명의 전사자가 생겼는지 확인조차 할 수 없었다. 날이 밝아오자 작전명령이 또 날아들었다.
"총알이 있는 대로 집중 사격하고 후퇴하라"는 명령이었다. 명령에 따라 총알을 다 쏟아 부었다. 총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새벽하늘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중공군이 발뒤꿈치까지 다가오면서 따발총을 연신쏘아 댔다. 부상자가 생겨도 돌볼 겨를 없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의기양양하게 전진하며 콧노래 부르던 때가 엊그젠데, 날개 꺾인 새들처럼 기세가 꺾여 목숨하나 챙기는 데도 힘이 들었다. 나와 동행하던 전우가 몇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전사한 전우들은 북한 땅 어느 곳인가 뼈를 묻고 영혼들은 지금도 그 하늘 어디에서 울고 있을 것이다.
▶중공군 참가
중공군은 피리를 불며 좇아오고 발걸음은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평소에 걷던 걸음보다 느리고 목이 말랐다. 부대는 오열을 갖추지 못한 채 통일성마저 잃어버려 오합지졸이었다. 어딘가 숨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도망치듯 쫓기다 보니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나는 총을 메고 수류탄을 가슴에 달았지만 싸우는 병사이기를 포기한 듯했다. 전열을 재정비하고 질서를 찾을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후퇴를 거듭하면서도 인민군 패잔병과 십여 차례 교전했다. 적의 패잔병들은 아군의 퇴로에 매복했다가 기습공격을 가해왔다.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그들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쫓고 쫓기면서 한 전투는 끝났다. 우리는 잔여 인원을 규합하여 부대를 재편성했다. 뒤에서는 중공군이 따라오고 인민군은 퇴로마다 매복하고 있었다. 그들의 작전에 완전히 포위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전상자를 교대로 업고 살얼음판 청천강을 건너 우리가 야영했던 구장球場까지 후퇴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재정비하고 있을 때 초산전투에서 패배한 6사단 잔여 병들이 10여 명씩 무리지어 포위망을 뚫고 도착하고 있었다.
▶인해전술
50년 11월말, 대공세작전이 시작되었다. 중공군은 인해전술을 폈다. 인해전술과 야간 기습 공격에 유엔군과 아군은 무방비 상태였다. 밤중에 중공군들이 불어대는 피리소리는 소름이 돋았다. 꼭 저승사자들이 문 밖에서 수군대는 소리 같았다. 총소리도 나지 않았고 대포소리도 없이 그냥 온몸이 굳어져 갔다. 눈만 끄먹거리던 전우들은 이젠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다. 서로 마주보며 한숨을 내뱉는데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공격할 때는 졸음도 오지 않았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그날따라 팔다리에 힘이 쭉 빠지고 졸리고 배가 고팠다. 그 음습한 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도 잠시 총성이 멎고 달이 밝았다. 초저녁에 잠잠 하던 전선 밤공기가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5리 길 되는 적진에서 나팔과 피리를 불고 북을 울리며 호루라기를 불어댔다. 내가 전투에 참가한 이래로 처음 느껴보는 음산함이었다. 이내 장막을 깨고 따발총 소리가 밤공기를 흔들어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분위기에 억압되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귀청이 찢어질 듯이 따가웠다.
▶새로운 전쟁
50년 12월 4일. 맥아더 사령관이 "새로운 전쟁이 시작 되었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 발표문에 따라 유엔군이 점령했던 평양에서 모두 철수하고 북진 중인 전군에 "12월 말까지 철수 하여 삼팔선에 재집결하라."는 작전 명령이 하달되었다.
50년 12월 5일. 우리 8사단은 평북구장에서 춘천까지 장장 4백여 리를 철수했다. 철수 작전이 도보행군으로 남하기 시작한 것이다. 1개 중대 단위로 북한의 청년단원 2-30명이 동원되어 소 두세 마리에 보급품을 싣고 내려오는 행렬은 평안남도 회천을 거처 황해도 곡산. 강원도 이천. 철원. 갈말을 지났다. 도보로 22일 간이나 철수행군은 계속되었다.
50년 12월 27일. 춘천이 가까운 삼팔선상에 도착했다. 하루 평균 30킬로미터를 도보로 행군했다. 철수 도중에 인민군 패잔병과 10여 차례 교전도 했다. 철수하는 부대 뒤에는 중공군이 따라오고 인민군 패잔병이 앞을 막았다.
50년 12월 31일. 한국전선은 남북한이 다시 삼팔선상에서 대치했다. 이날 자정을 기해 1차적으로 중공군 11만 명, 인민군 6만 여명, 도합 17만 명의 병력으로 6.25 초기와 거의 같은 경로로 삼팔선 돌파작전을 개시해 왔다.
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그들에게 내주고 말았다. 이른바 '1.4후퇴'라는 것이다. 승승장구하던 국군이 비참하게 서울을 내주는 치욕의 날이 되었다.
▶1.4후퇴
우리부대는 이 때 춘천 변두리에서 3일간 장비검열을 마쳤다. 손실된 병력도 충원되었다. 그리고 양구방면으로 약 20킬로미터 지점인 춘성군 북안면 오항리, 일대의 삼팔선에 도착했다. 사명산 주령인 부영산 일대에 배치되었다. 거기서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적과의 접전을 기다렸다. 처음에는 북한 인민군이 나타나 교전이 소강상태였으나 51년 1월1일을 기해 중공군이 삼팔선을 공격해 옴으로써 3일간이나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청천강까지 북진했던 전우들의 희생이 컸다. 이때 중대 서무를 보던 김현주 일등상사가 진급하여 중대 선임하사로 발령이 나고 내가 중대 CP로 내려와 OP와의 연락업무를 맡게 되었다. 8사단은 1.4후퇴명령으로 며칠간 강행군을 계속했다. 홍청. 횡성. 원주. 문막. 충주를 거쳐 1월 9일 제천 한강상류 북노리 월악산 부근에 집결했다. 지리산에서 소백산맥을 따라 북상하는 인민군과 빨치산의 이동경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매복 수색작전에 돌입했다. 이곳에서 20일간 머무르면서 전력강화를 위한 훈련을 받고 장기교육을 받으면서 부대 재정비와 심신의 충전기회를 가졌다.
<12월11일 자 시니어문학상 면에는 논픽션 당선작이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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