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년 2월 2일. 우리 16연대는 충북 월악산에서 다시 부대일제정비를 마치고 미 제2사단과 교대하기 위해 횡선전선으로 이동했다. 횡성 북방 2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성지봉과 오음산 삼마치재를 주저항선으로 삼았다. 그곳에서 적과 며칠간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치열한 공방전으로 쌍방 간 많은 병력 손실 입었다.
▶중대장 전사
51년 2월 8일. 중대장 연락병 임무를 맡았던 고향 전우 박준영 군이 업무연락 차 8킬로미터 떨어진 후방 CP로 오는 도중에 중대장 강신재 대위와 부관, 통신병이 방카에 함께 있다가 적의 포격으로 모두 전사했다는 비보를 전해 왔다. 중대장 강신재 대위는 육사 8기생이다. 국가관이 투철한 모범 장교로 부대 내에서 회자되었다. 중대장 강신재 대위의 전사는 너무 안타깝고 슬픈 일이었다. 16연대 후방 CP는 횡성군 공근면 초월리 분지에 있었고, 9중대 CP는 민간인 임병천씨 집에 본부를 두었다. 나는 고향 전우 김구환과 함께 있었다.
51년 2월 11일. 중대장 연락병인 박준영이 도착했다. 중대장의 사후처리와 중대 지원업무, 행정업무에 의견을 나누었다. 이날 밤, 박준영이 내의를 빨아서 방에 줄을 치고 널어놓았다. 상당한 시간이 지나도록 세탁물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모두 곤한 잠에 취해버렸다. 문밖에는 3-40센티미터의 눈이 내리고 날씨는 영하 5도 이하로 내려갔다. 잠결에 이상한 소리가 나서 깨어보니 삽질하는 소리였다. 집 앞 3미터 거리에서 방공호를 파는 소리였다. 불도 켜지 못하고 모두 깨워서 대책을 의논했다. 이때 예광탄이 발사되고 곧 교전이 벌어졌다. 16연대 3대대 후방본부와 각 중대 행정반 그리고 각종 전쟁지원물품보급소에 100여명의 병력이 있었으나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적에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이날 밤, 전후방을 포한한 8사단 지역인 횡성. 원주. 전역을 중공군에 포위당하여 꼼짝달싹 못했다. 그들의 인해전술에 갇혀버린 것이다.
▶포로가 되다
다음 날부터 3일간 적의 대대적인 수색작전이 전개됐다. 야간에만 잡혀온 아군의 포로 수가 수백 명에 달했다. 주간에는 유엔군의 폭격으로 중공군의 활동이 뜸했다. 포로 신세가 된 우리들을 나무가 많은 숲속으로 숨게 했다. 적의 포로호송부대는 포로로 잡힌 아군병사들을 야음을 틈타 북으로 끌고 갔다. 우리는 모든 물품을 다 버리고 서류와 생필품 몇 가지만 배낭에 넣었다. 그리고 같은 방에 있던 우리 세 사람은 적의 포위망을 탈출하기 위해 초원리 뒷산 고지에 오르기 시작했다. 눈이 쌓여 하반신이 거의 묻히고, 한 발 내디디면 두 발 미끄러졌다. 예광탄이 발사되면 눈 위로 포복하면서 몇 시간 만에 겨우 고지에 올랐다. 낙엽을 모아 구덩이를 메우고 그 위에 눈으로 위장한 뒤에 세 사람이 숨어 있었다. 초원리 분지에는 16연대의 각 대대 후방CP와 미군 포병대가 밀집 주둔해 있었다. 대포, 자동차, 유류탱크, 각종 탄약, 보급품 등을 적군이 사용 못하도록 포병부대가 밤샘 포사격을 가했다. 초원리 분지가 불바다가 되었다. 정상에서 원주방향으로 가려했으나 달이 너무 밝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밤에 행동한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때문에 다음 날 아침 동트는 대로 탈출하자는 의논일치를 봤다. 세 사람은 골짜기 오목하게 팬 곳에 낙엽을 채워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날이 새기만 기다렸다.
51년 2월 12일. 날이 밝자 산 정상에서 노원리 분지를 향해 내려다보았다. 중공군이 개미 떼처럼 무리지어 다가오가고 있었다. 비로소 완전 포위되었음을 직감했다. 탈출 목적지는 원주였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도보로는 불가능했다. 낮에는 적의 습격이 두려워 어둠을 틈타 행동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조금은 안전한 숲에서 숨어 있기로 했다. 오후 2시경 중공군이 우리가 숨어 있는 산골짜기를 토끼몰이 하듯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발각된 우리는 두 손을 높이 들어 항복신호를 보냈다.
▶ 포로, 북으로 이송
중공군 뒤에 따르는 수십 명의 포로가 우리 부대원들이었다. 며칠 동안 함께 싸웠던 낯익은 얼굴도 보였다. 워낙 빠르게 인원이 보충되다보니 낯을 익힐 짬이 별로 없었다. 그 포로들 중에는 미군 병사도 몇 명 끼어 있었는데 저녁까지 붙잡혀 온 숫자가 수백 명에 달했다. 내 몸을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이 포로 신세다. 그들의 신호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어스름한 밤을 이용해 북으로 데리고 간다는 전갈이 왔다. 포로들을 소대단위로 편성하고 중간 중간에 중공군 감시병을 세워 개인행동이 어려웠다.
51년 2월 13일. 우리 포로들은 북으로 가고 있었다. 낮에는 아군의 비행공습 때문에 행동반경이 좁아졌다. 낮에는 소나무가 우거진 숲속에서 취침을 시키고, 밤이 되어서야 국도를 따라 북상했다. 도로 양쪽에 늘어선 대열의 길이가 8킬로미터를 넘었다. 하룻밤 내내 걸어서 20킬로미터를 걸었다. 홍천을 지나고 춘천 소양강을 건너 북한강 상류로 진입할 무렵에는 아군의 포성도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탐문해 보았다. 일부는 강원도 북부 평강 수용소에 수감하고, 일부는 비행장 건설현장에 보낸다는 것이었다. 성분이 좋은 사람은 재 교육시켜 인민군으로 편입시키고, 신체가 좋은 사람은 시베리아 벌목공으로 보낸다고도 했다. 이때부터 감시병이 배로 증가되어 감시가 한층 강화되었다. 포로 중에 감시병 눈을 피해 탈출하다가 총살당하는 경우도 여러 차례 목격되었다.
▶소나무 껍질을 벗겨먹다
7일 동안 아무것도 입에 넣지 못했다. 어느 산골마을을 지날 때, 들판에 쌓여 있는 콩 단을 털어서 날콩을 씹어 먹기도 하고, 먹을 만한 풀잎이며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기도 했다. 그런 것을 먹었는데도 아무도 탈이 나지 않았다. 짐승들이 겨울 산에서 먹이를 구해 먹는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산에 눈이 많아 피신할 수 없을 때는 민가로 내려와 빈집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빈집의 구석구석을 뒤져 먹을거리를 찾아보았으나 마땅한 먹거리가 없었다. 무나 감자 구덩이를 찾느라고 포로끼리 야단법석을 떨기도 하고, 뭐 먹을 만한 것이 생기면 독수리 먹이 채가듯 낚아가 버렸다. 부엌을 먼저 차지하려고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12월18일 자 시니어문학상 면에는 논픽션 당선작이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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