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만나게 되는 8가지 고통 중에 애별리고愛別離苦와 원증회고怨憎會苦가 있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야 하는 고통, 미워하는 사람과 살아야 하는 고통입니다. 만약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신은 어떤 것을 선택하실까요?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 살아야 하는 원증회고는 삶을 막장 드라마로 만들고, 사랑하는 이와 이별해야 하는 애별리고는 멜로드라마로 만들지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영화, 보셨습니까? 러닝타임이 3시간 가까이 되는 이 영화가 지루하지 않은 것은 바로 애별리고까지도 사랑이 된 남자의 그리움이 지금 이 생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을 각인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남들과는 다르게 점점 젊어지는 숙명을 타고 태어난 벤자민은 어느 시간, 처음 보는 순간부터 한눈에 들어 무수히 떠돌던 날들에도 한사코 잊지 못했던 여인과 살고 있습니다. 함께 할수록 좋은 이들의 사랑은 아이의 탄생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함께 나이 들어갈 수 없으니 아빠 노릇, 남편 노릇을 해주기 힘든 겁니다. 그는 모든 재산을 정리해서 여인에게 남겨주고 빈손으로 떠납니다. 아이가 크기 전에 남편 노릇, 아빠 노릇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라는 기원과 함께. 덕분에 그의 사랑 데이지는 울타리 노릇 제대로 하는 좋은 남자를 만나고, 그들의 딸 캐롤라인은 그 좋은 남자를 아버지로 알고 잘 성장합니다.
반면 그들을 떠난 벤자민은 그리움과 함께 세상을 떠돌면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지 못한 딸을 향해 가닿지 못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굿나잇 키스를 해주고 싶다고. 5살이 되면 입학식에도 데려가고 싶고, 6살이 되면 네게 피아노를 가르쳐주고 싶다고. 슬퍼할 때는 안아주고도 싶다고. 함께 살지 못하는 딸을 향한 그리움을 품고 세상을 떠도는 그의 편지는 삶이 선물하는 비밀들을 훔쳐보게 합니다.
"살아서 너무 늦거나 빠른 것은 없다. 너는 뭐든 될 수 있다. 꿈을 이루는데 시간제한은 없어, 지금처럼 살아도 되고, 새 삶을 시작해도 돼.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것을 느끼고, 너와는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 후회 없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후회가 생긴다면 용기를 내서 다시 시작하렴."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 깊은 곳엔 우리가 기억도 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혹은 생명들의 기원이 숨처럼, 물처럼 흐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 덕택에 우리가 무사히 숨을 쉬고 생을 배우며 여기까지 온 것인지도.
점점 젊어지는 숙명을 타고 났다는 건 태어날 땐 늙었다는 거지요? 백내장과 관절염을 앓고 있는 노인으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고 양로원에서 성장합니다. 그런데 젊은 날의 짐을 내려놓은 노인들이 사는 그 양로원은 그에게는 더없이 맞춤한 집이었습니다. 더 이상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지 않는 할머니, 할아버지 사이에는 묘한 평화가 흐르는 법이니까요.

추억과 연륜을 나이테처럼 가지고 있는 그들은 추억도 없이 늙은 아이를 친구처럼 거리감 없이 대하면서도 아이임을 잊지 않고 돌봐줍니다. 책임감으로 무장하지 않고 삶을 나누고, 사랑이랄 것도 없이 사랑을 베푸는 어른들의 품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은 법입니다.
당장 외출할 것처럼 늘 화사하게 차려입고 손가락에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빼놓는 법이 없는 할머니는 외출한 적도, 누가 찾아온 적도 없다지요? 그 외로운 할머니가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줍니다. 잘 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느끼는 거라고, 느낌을 담아서 연주하는 법을 알려주고 있는 할머니는 이렇게 말할 줄 아는 노인이었습니다. "누구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서야 그 사람의 소중함을 아는 법이란다."
그 외로운 할머니에게서 벤자민은 피아노뿐 아니라 그리움을 배웠습니다. 사실, 지금 외롭지 않은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평생 외롭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외로움은 인간의 숙명입니다. 그런데 그 숙명을 소화해내는 방식엔 차이가 있지요? 거기 양로원을 드나드는 또 한 사람에게 벤자민이 배운 것은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었습니다.
"삶은 외로운 거야. 우리처럼 특별한 사람에겐 더욱! 비밀 하나 말해줄까? 뚱보, 말라깽이, 꺽쇠, 또 이런저런 사람들, 그들도 우리처럼 외로워해.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외로움을 무서워한다는 거지."
그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삶을 두려워하는 뿌리인 거지요? 반대로 그 외로움에 대한 사랑이 삶 사랑의 뿌리이고 자유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거지요?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저마다의 시간을 사는 까닭에 곧잘 잊습니다. 삶은 헤아릴 수 없는 상호작용이고, 그 상호작용의 결과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다 감당하기 힘든 순간이 오면 무수한 상호작용의 무서움을 알게 됩니다. 벤자민의 말대로 우연이든, 고의든 그것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벤자민의 사랑 데이지는 그날의 사고로 무릎 뼈가 으스러지게 전에는 전도유망한 무용수였습니다. 그 날 그 택시기사가 커피를 사려고 카페에 들르지만 않았어도, 그 때 그 시간 데이지가 공연연습을 5분만 더, 혹은 5분만 덜, 했더라도, 데이지가 신발 끈이 풀려 다시 묶는 동료를 기다리지만 않았어도, 그 택시기사가 잠시 한눈만 팔지 않았어도, 데이지는 다리를 다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데이지는 다리를 다쳤고, 더 이상 무용수일 수는 없었습니다.
무수한 상호작용의 결과로 삶이 바뀌지만 우리 인생을, 그 복잡한 상호작용 탓으로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한 사람에게서 그 결과가 드러나면 싫든 좋든 그것은 온전히 그의 삶이 되고 그의 책임이 됩니다. 그러니 삶이 외로울 밖에요.
나의 외로움을 사랑하고, 나의 불운을 사랑하고, 나의 행운을 사랑하고, 나의 자유를 사랑해야 마지막 순간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현실이 싫으면 미친개처럼 날뛰거나, 욕을 하고, 신을 저주해도 돼. 그러나 마지막 순간엔 받아들여야지."
거꾸로 가는 시계를 가진 사람들, 영혼이 육체를 배반하고 육체가 영혼을 배반하며 살아가야 하기에 외로움이 숙명이 된 사람들은 방랑하고 헤매지만 외로움이 두려움이 되지 않습니다. 가진 것도 없이 떠돌며 방랑하다 쫌쫌한 나이테와도 같은 단단한 외로움의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들이 다다르게 된 생의 깊은 곳을 슬쩍 훔쳐본 기분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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