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정치가 정암 조광조가 1519년 12월 20일 유배지 전남 화순군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숨졌다. 관직에 몸담은 지 4년 만으로 38세 때였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성리학의 토대 위에 유교적 이상 국가를 건설하고자 정암 조광조를 중용했다. 조광조는 사명감에 불탔다.
그는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와 곳곳에서 마찰을 일으켰고 3, 4일에 한 번씩 상소를 올리며 개혁을 주장했다. 이에 훈구파와 충돌은 물론이고, 중종 임금도 조광조의 개혁에 피로를 느꼈다.
1519년 10월 반정공신 117명 중 76명의 훈작을 삭탈할 때까지만 해도 조광조는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어진 기묘사화로 조광조는 역습을 받았고, 유배형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사약을 받았다.조두진 문화부장
조두진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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