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왕(王)실장'의 귀환

박병선 논설위원
박병선 논설위원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만큼 극심한 영욕을 맛본 인물도 드물다. 1972년 검사 시절 유신헌법 제정에 참여한 이후 승승장구해 검찰총장·법무부장관, 3선 국회의원 등으로 인생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그것으로 마무리했으면 '대단한 인물'로 기억될 텐데, 2013년 박근혜 정부 제2대 비서실장에 취임한 것은 최악의 한 수였다. 만 74세로 역대 최고령 비서실장이었던 만큼 세간에는 '노욕'(老慾)으로 비쳤지만, 본인은 '마지막 봉사'라고 주장했다.

그의 별명은 '왕실장' '기춘대원군'이었다. 박 전 대통령과의 친분과 충성심, 인맥 등을 활용해 당정청(黨政靑)을 한손에 장악한, 명실상부한 '정권 2인자'였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보좌를 제대로 못 한 '실세 비서실장'의 책임은 엄중했다. 그는 1년 8개월의 마지막 공직 생활로 인해 80세 노구를 이끌고 감옥에 드나드는 신세가 됐으니 '인생무상' '권력무상'을 절절히 곱씹을 만했다.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비서실장의 권력이 막강하고 중요하다. 모든 국정 현안이 비서실장에게 집중되고 이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통치 철학, 정권의 국정 방향까지 좌우할 수 있는 자리가 비서실장이다.

미국은 1938년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 비서실의 행동 규범을 제한하는 규범을 만들었다. 브라운로우(Brownlow)위원회가 만든 '백악관 운영 규범'에는 비서실장에 대해 '전면에 나서지 말 것' '명령이나 결정을 내리지 말 것' '공적인 발언을 삼갈 것'이라고 규정했다.〈문재철의 책 '권력'〉 한국과는 달리, 비서실장을 놓고 '왕실장'이니 '실세 실장'이니 하면서 비꼴 수 없는 구조다.

8일 노영민 주중대사가 비서실장에 임명되자, 일부 언론은 그를 '실세 왕실장'이라고 지칭했다. '왕실장'이라는 말에 '실세'가 덧붙을 정도이니 엄청난 파워를 가진 비서실장임이 분명하다. '친문' 핵심인 데다 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기춘대원군'에 전혀 꿀리지 않는 위상이다. '실세 왕실장'이 문 대통령을 어떻게 보좌할지 지켜보는 것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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