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안이 빈한해지면 착한 부인이 생각나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현명한 재상이 생각난다'는 말처럼 삶이 팍팍해질수록 국민의 존경을 받는 큰 어른의 말씀과 따스한 손길이 더욱 그리운 법이다. 선종 10주기를 맞아 김수환 추기경의 부재가 크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 추기경은 어두운 시기에 빛을 비추며 방향을 열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고통을 어루만지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며 현대사의 고비마다 양심의 목소리를 드러냈다. 그랬기에 우리는 언제나 든든했고 늘 희망에 차 있을 수 있었다.
새삼 김수환 추기경의 부재가 아쉬운 이즈음, 생전에 그가 남긴 족적과 말씀을 좇아 오늘을 사는 우리가 삶의 지표로 삼아본다.
◆유머와 통합…낮은 곳을 향하는 리더십
김수환 추기경의 리더십 핵심은 사목표어인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신앙과 삶이 일치된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추기경으로 권위를 내세우거나 섬김을 받기를 원하거나 보통 사람과 '거리'를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소탈과 친근의 리더십으로 일관했다.
일찍이 일본에서 공부하고 신부가 된 후 독일에서 공부한 바 있는 그에게 지인이 물었다. "추기경님은 몇 개의 언어를 말하세요?" 그러자 추기경은 "난 두 개의 언어를 말합니다"고 답했다. "어느 나라 언어인가요?"로 되묻자 의외의 답이 나왔다. "참말과 거짓말이죠."
성직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유머로 빗대어 말함으로써 좌중을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1967년 로마에서 평신도 대회가 열렸다. 그곳 평신도들이 사제와 주교에 대한 불만을 심하게 터뜨리자 영국 선교사가 속이 상해 김 추기경에게 하소연 했다. 이에 김 추기경은 "여태껏 우리가 평신자들을 너무 어리게 취급했다가 갑자가 어른대우를 하니 신자들도 사춘기가 필요하지 않겠나, 그러니 우리가 참아야지"라며 평신도를 감쌌다. 이후 이런 추기경의 열린 마음과 이해심이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
◆가난한 이들의 벗, 차별 없는 사랑
미국 가수 마이클 잭슨이 방한했을 때 김 추기경은 그를 만나기로 결정했다. 그때 신자들이 "왜 그런 사람을 만나느냐"고 항의하자 김 추기경은 "죄인, 창녀와 공공연히 어울리기 좋아하셨던 예수님을 따르는 내가 마이클 잭슨을 만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고 답했다. 더 나아가 그는 "사실 마이클 잭슨이 어떻게 우리 청소년들을 잡아끄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를 만나고 나서야 '하늘로부터 사랑의 영감을 느끼며 그 느낌을 전하려고 노력합니다'는 그의 말에 내가 더 사색할 수 있는 자극을 받았습니다"라고 밝혔다.
김 추기경은 음지의 여성들에게도 애정을 쏟았다. 어느 추석날 여성들의 쉼터를 방문한 김 추기경에게 한 여성이 "추기경님 담뱃불 좀 주세요"라고 말하자 순간 싸늘해질 수 있는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는 "네, 여기 있습니다"며 불을 전해주었다. 상황이 이러하자 여성들은 허심탄회하게 자신들의 고충을 털어놓았고 추기경은 그날 이들과 함께 윷놀이를 하며 신나는 하루를 보냈다.
이처럼 김 추기경은 노동자, 학생, 빈민, 사형수, 나환우, 에이즈 환자 등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인권을 확보하기 위해 앞장서서 문제를 해결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고쳐야 할 일은 용기로 맞서
1993년 김 추기경은 세계를 향해 이렇게 선언했다.
"대한제국 말기에 일제의 무력침략 앞에 풍전등화 같았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 땅의 국민들이 자구책으로 한 모든 행위는 정당방위이며 의거로 보아야 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은 살인이 아닙니다. 정당방위입니다." 이로 인해 안중근 의사는 의거 84년 만에 가톨릭 사상에 의거한 평화주의자요 인권운동가로 정체성이 복원됐다.
종교인으로서 김 추기경은 또한 보기 드물게 다른 종교에도 시종 열린 태도를 보였다. 심산 김창숙 선생의 묘소를 찾아가 유교식으로 술을 따르고 재배하는가 하면 서울 성북동 길상사 개원 법요식에도 참석했었다.
◆변화와 쇄신에도 언제나 앞장을
김 추기경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정신으로 한국교회의 쇄신을 단행했다. 교회는 이웃과 사회, 세계를 위해 봉사하는 중심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도 소외됨 없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하는 도구이며, 또한 이를 나타내는 표지여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이에 의거하여 김 추기경은 유신개헌을 준비하던 1971년 명동성당 성탄 미사에서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이런 법을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후 가톨릭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감시와 압박이 노골화되었다. 하지만 김 추기경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유신정권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전했다. 이뿐 아니라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범을 숨겨준 교회에 쏟아지는 비난을 온몸으로 막아냈고,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는 1987년 6월 항쟁에서 승리의 물꼬를 튼 업적은 빼놓을 수 없다.
◆소박한 일상, 나눔과 희생
동그라미 안에 눈과 코, 입을 간단한 선으로 쓱쓱 그린 김 추기경의 자화상 아래엔 '바보야'라고 적혀있다. 이에 대해 한 기자의 질문에 대해 그는 "저 모습 그대로는 아니지만 내 모습은 바보에 가까워요"라고 답한 적이 있다.
이 일화는 김 추기경이 자신에 대해 진정으로 부끄러운 마음을 갖고 있었음과 동시에 끊임없이 자신을 경계하는 질책이었음을 보여준다. 한번은 추기경 숙소에 행려자가 불쑥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는 "배가 고프니 돈을 달라"고 사정했고 이에 추기경 지갑에는 단돈 1만원도 없었다. 이에 추기경은 "지금 돈이 없으니 잠시 기다려라"고 한 뒤 비서 신부를 불러 돈을 조금 주게 해서 돌려보낸 일이 있다. 당시 서울대교구장이었던 김 추기경은 교구법인 모든 재산이 자신의 명의로 돼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늘 가난했고 소박한 삶을 유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2009년 2월 김 추기경은 선종 때 자신의 각막을 낯선 이에게 넘겨 빛을 선물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나라 장기 기증자가 급증한 것은 '영성에 바탕을 둔 리더십'의 빛나는 결과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시대의 큰 어른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이 2009년 2월 16일 선종하면서 남긴 마지막 말이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선종 10주기를 맞았다.
돌이켜 보면 우리 사회는 이념, 계층, 세대 등 갈등으로 인해 급격한 변화를 맞고 있다. 당파논리에 묶인 정치는 화합의 실마리를 찾을 생각조차 못하고, 집단논리에 얽매인 경제는 상생의 생산성을 잃어버렸다. 계층 간 괴리는 소외감과 냉소주의를 양산하고 세대 간 단절은 무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높은 지위에도 막론하고 항상 그늘진 곳과 떨어진 곳을 살피던 큰 어른의 손길과 눈길이 어느 때보다 아쉬운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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