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이라는 숫자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유명한 할리우드 영화를 떠올린다. 소방관에게 '300'이라는 숫자는 300초, 즉 사람을 살리는 5분 내 현장 도착의 중요성이라는 큰 의미로 먼저 다가온다. '소방차 길 터주기'의 중요성은 언론 보도나 캠페인 덕에 불문가지(不問可知묻지 않아도 안다)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소방차 길 터주기'가 5분을 위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화재 시 5분 이내 현장에 도착하지 못하면 초기 진압에 실패해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을 막기 어렵다. 심정지 환자도 5분이 지나면 뇌 손상이 시작돼 뇌사 상태나 사망에까지 이른다. 5분을 골든타임이라 부르는 이유다.
지난해엔 참사로 불릴 만한 대형 화재가 유난히 빈발했다. 시민들은 5분 내 현장 도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나, 현실은 여전히 출동 중인 소방차를 보면서도 태연하게 횡단보도를 건너거나 차량 꼬리 물기를 일삼아 안타까움을 안겨준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불법 주·정차다.
대구소방안전본부는 지난해부터 선제적 대응에 주안점을 둔 '톱 다운(Top-Down·하향식) 출동'을 시행 중이다. 화재 초기 대규모 소방력을 투입하고 화재 양상에 따라 소방력을 단계적으로 축소하는 방식이다. 기존의 '바텀 업'(Bottom-Up·소방력을 단계적으로 추가하는 것) 방식보다 초기 대응에 효과적이다.
이 때문에 화재 초기엔 이전보다 많은 소방차가 화재 현장에 출동하고 있다. 그러나 불법 주·정차된 골목은 소방차 중 일부만 현장에 접근할 수 있게 만들어 톱 다운 방식의 효율성을 저해한다. 주변 통행 장애도 많이 발생해 일부 시민에게 불편을 주는 경우도 많다.
불법 주·정차 문제는 2017년 12월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참사나 2018년 3월 부산 아파트 일가족 참사 사건을 계기로 엄격히 단속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키웠다. 이에 따라 지난해 8월부터 소방기본법에 '소방자동차 전용구역 등'에 관한 사항이 신설됐다. 100가구 이상 아파트, 3층 이상 기숙사에 소방전용구역을 설치해야 하며, 소방차 전용구역 진입을 방해하는 주차 등 행위도 단속할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다만 해당 법령은 기존 건축물에 소급 적용되지 않아 별다른 규제 방법이 없는 등 실효성이 떨어지는 제도로 전락하고 있다.
소방관인 나조차도 출퇴근길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보면 녹색등으로 바뀌기만을 기다렸다가 바쁘게 출발하느라 갑자기 나타날지 모를 긴급 차량을 생각지 못한다. 주차 공간을 찾아 한참을 헤매다 보면 소방차 전용구역을 보고 '잠깐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소방관도 아닌 일반 시민 입장이라면 오죽할까.
그럼에도 예고 없이 찾아오는 재난에 또다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의 대처를 하지 않으려면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변화해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법과 제도가 마련되고, 첨단 장비를 갖추어도 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배려가 없다면 모든 노력은 노이무공(勞而無功)이 되기 때문이다.
안전을 위해 불편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성숙한 시민의식과 자발적인 소방 출동로 확보를 통해 우리의 안전 통행로도 확보될 수 있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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