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학부모를 위한 권장도서 100선] 브리콜라주적 아이로 키우기

김정운 저
김정운 저 '에디톨로지'

10여년 전, 학부모와 함께 하는 독서 모임을 한 적이 있습니다. 늦은 저녁 도서관에서 책을 매개로 교사와 학부모가 이야기할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문득 잊고 있던 당시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말을 담는 그릇이 '아이의 성적'에서 '책'으로 달라지니 그릇 속에 담기는 이야기도 달라지더군요.

아이들에게만 책 읽기를 강요하기 전에 부모 스스로 일상 독서가가 되어 책을 즐기며 '내 생태계'를 가꿔가면 어떨까요? 책을 통해 교육과 성장에 관한 따뜻한 학부모 문화를 만들어 가는 이야기를 이 코너에서 펼쳐보려 합니다.

◆창의성은 편집이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은 저서 '에디톨로지'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창조란 유에서 무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며 기존의 것들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데서 탄생한다." 자신의 관점으로 편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에디톨로지(편집학)의 핵심입니다.

드라마 작가는 디지털 자료로 변환된 조선왕조실록의 단 몇 줄 기록을 자유롭게 연결해 주인공을 탄생시킵니다. 역사학자는 다양한 검색 방법을 통해 이전에 한 번도 시도하지 못한 학문적 접근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베스트셀러 작가 말콤 글래드웰은 스티브 잡스가 사망한 2011년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스티브 잡스의 창의성은 편집(editing)'이라고 했습니다. 피카소가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고 이야기했을 때 '훔친다'는 말도 '편집'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일테지요.

'편집'을 하려면 그 재료가 필요할 텐데요. 오늘날에는 동영상, 음성, 사진, 문자 등 무수히 많은 콘텐츠가 있습니다. 재료의 수와 양으로만 본다면 지금까지 신뢰할 만한 정보를 제공하는 매체로써 책이 누리던 독점적 지위는 점점 약해지는 듯 합니다. 살펴보면 책의 역할과 책을 둘러싼 환경이 새롭게 달라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정보와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더 이상 책을 통하지 않고서도 정보를 얻고, 읽기만이 아닌 듣기, 보기 등을 통해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보는 라디오, 오디오북, 보는 책 등 경계가 없는 편집의 산물들은 이미 친숙한 콘텐츠들입니다. 이미 각 분야의 경계가 점점 흐릿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분야를 연결해 의미를 창출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해졌습니다. 흐릿한 경계의 시대, 우리 아이들은 이 좋은 재료를 활용할 줄 아는 요리사가 돼야 합니다. 장인의 개념이 아닌 자르고, 굽고, 짓고, 담아내는 모든 걸 해낼 요리사의 재능을 가진 사람의 가치가 더 올라갈 것입니다.

◆브리콜라주적 아이 키우기

우리는 무수한 과잉 정보들 중에서 불필요한 지식은 버리고 필요한 것만을 연결지어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지식은 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브리콜라주(bricolage)적 지식'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원시부족사회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레비스트로스는 그의 책 '야생의 사고'에서 부족사회의 문화체계가 어떻게 유지되고 전승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브리콜라주 개념을 사용합니다.

프랑스어인 브리콜라주는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 등으로 번역되는데, 바로 눈앞에 있는 것들만으로 필요한 것을 만드는 작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출판평론가 한기호는 '정보가 광속으로 날아다녀 모든 것이 공중으로 흩어져 사라지는 현실에서 눈앞에 주어진 정보들을 연결하는 브리콜라주적인 지식을 문자로 기록하는 것이 학문 연구에서도 중요해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엄지의 법칙(Rule of thumbs)'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경험을 중심에 두고 모든 일을 판단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자기 엄지를 지나치게 믿는 사람은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자신만의 감각'이 발달해 갑니다.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만 신속하게 반응하면서 많은 문제를 해결해 왔고 결과에 대해 별다른 문제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신의 경험 세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만의 고집과 신념으로 엄지를 만들어 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아이들에게 엄지 너머에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합니다. 가정과 학교에서 아이들이 좋은 책을 많이 읽게 하고, 그 내용을 자유롭게 자르고 이어 붙여 지식의 집을 새로 지을 수 있는 '브리콜라주' 능력을 키워줘야 할 것입니다.

지식을 자르고 잇고 발견하여 만들어내는 새로운 지식이 모여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갈 바탕을 만들어 간다면 참 좋겠습니다.

대구시교육청 학부모독서문화지원교사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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