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영동의 시대와 미술]궁핍한 시대의 모더니스트

미술평론가

계성고가 소장한 정점식의 1956년 작
계성고가 소장한 정점식의 1956년 작 '상황' 합판에 유채, 98.8x55.4cm

풍족한 생활에서 창작된 작품보다 역경에서 빚어낸 작품이 더 감동적일 때가 있다. 더구나 물질의 바탕 위에 이루어지는 미술작품에서 시대와 환경의 악조건을 무릅쓴 놀라운 성취를 거두는 것은 아이러니이자 예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예술작품이 물질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반하여 특히 가난과 곤경이 오히려 예술정신과 감각을 벼려서 빛나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일깨우기도 한다.

1953년 대구 USIS에서 열린 정점식의 개인전에 당시 지역 인사들이 보인 반응 속에 그런 자각과 찬사가 담겼다. "작품의 예리한 지성! 화가적 소질도 훌륭하지만 위축과 퇴폐와 괴멸의 복판에서 불안과 초조와 절망의 막바지에 서 있던 시대적 상황에서 그의 성취가 가능했다는 사실에 얼마나 눈물 날 일인가."(유시원) 일제 강점기의 굴욕과 억압 그리고 6.25의 참상을 겪은 뒤라 이런 감격들이 나올 만했다. 당시 30여 점의 출품작들을 일일이 알 수는 없지만 '토르소'(1952), '계성고 풍경'(1953) 등 그 무렵의 작품들로 독특함과 새로움을 짐작은 해볼 수 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56년에 만든 이 작품에서는 매우 지적이고 세련된 화풍을 확인할 수 있다. 단순히 선으로 만든 평면적인 추상작품인데 율동적인 리듬감과 간결하고 축약적인 구성이 사뭇 매력적이다. 마치 두 사람이 부둥켜안은 모습 같은데 얽히고설킨 인간관계를 암시하는 듯하다. 한 가닥의 선으로 모두 이어진 독특한 창안은 종이 위의 한 점에서 출발하여 어떤 형상을 만들어내는 '그리기 놀이'에서 착안했거나 혹은 유년의 '실뜨기 놀이'를 연상케도 한다.

1917년생인 정점식선생은 시대적 환경적 빈곤을 견디고 승리한 대표적인 예술가다. 화가로서의 활동 경력은 스무 살 경 1936년 대구 조선민보사가 주최한 제1회 남조선미술전람회에 '어느 못가(池畔)에서'를 출품한 무렵부터다. 그 후 1937년 자동차 드로잉 한 점과 1939년 8월 토함산과 석굴암 일대를 여행하며 남긴 스케치들이 전한다. 그리고 1941년 겨울 북만주로 가 1946년 5월까지 6년 가까이 하얼빈에 체류했다.

미국공보원 전시는 모더니스트로서 귀향해 거둔 첫 번째 개가였다. 이듬해 계성학교 교사가 되어 화단의 관행적인 화풍에 저항하는 참신한 지성은 더욱 예리해졌고 모더니즘 작가로서 한층 촉망받는 화가가 되었다. 그는 훗날 "사방의 공격으로부터 추상을 지키며 이해시키는데 진력했다."라고 소회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추상을 옹호한 것만으로야. 1950년대의 그를 본다면 차라리 '식민주의를 극복할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화가로 평가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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