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天皇)이라고 부르기 싫다. 일왕(日王)이다."
한국인이라면 일본 천황을 호칭할 때 대개 비슷한 생각을 한다. 식민지 역사와 껄끄러운 한일 관계를 떠올리면 욕을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구시대적인 호칭까지 쓰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북한은 일본이 못마땅할 때마다 조선시대처럼 왜왕(倭王)이라 칭하지만, '막가파식' 표현에 가깝다.
사실 천황 호칭의 역사는 일본 제국주의 성장 과정과 맞물려 있다. 일본이 천황 칭호를 처음 사용한 것은 7세기 후반 덴무 천황(天武天皇) 때다. 당나라 고종의 '천황' 칭호를 흉내내 '대왕'(大王) 대신 '천황'으로 개명하면서 현인신(現人神·살아있는 인간 신)으로 신격화했다. 왕권이 융성하던 100여 년 동안 쓰였지만, 왕권 추락과 함께 귀족·막부의 견제로 천황 칭호는 오래된 골동품처럼 사라진 듯했다.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천황 신격화가 시작되면서 이 칭호가 다시 등장했다.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에서 "메이지유신은 고대에 일시적으로 사용했던 천황 칭호를 부활시켰다"고 썼다. 1889년 메이지헌법에 천황이 공식 칭호로 사용됐지만, 황제(皇帝) 칭호에도 미련이 있었다. 1910년 한일병합 조약에는 '일본황제폐하'라고 써 있다. 천황 칭호만 쓰도록 공식화한 것은 일본이 독자적인 제국주의 길로 접어든 1935년이었다. 전 세계에서 영어 명칭으로 'King'(왕)이 아니라 'Emperor'(황제)를 아직까지 쓰는 것도 일본이 유일하다.
이런 역사를 아는 한국인이 무작정 천황이라고 부르기에는 난감하다. 그렇다고 일본식으로 '덴노'라고 하기에도 찜찜하다. 한국 언론은 '일왕'이라고 표기하지만, 일본인은 이를 불쾌하게 여긴다. 아무래도 한·일이 가까워지려면 호칭 장벽부터 없애야 할 것 같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지난달 29일 자신의 트위터에 '아키히토 천황님'이라고 표기해 논란을 불렀다. 김대중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도 '천황'이라고 했다가 이런저런 구설에 올랐지만, 거기에 '님'까지 붙인 것은 너무 과하다. 외교 관례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호칭에 얽힌 역사는 알고 외교를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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